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의와 복 (마 5:1-6)

새벽지기1 2016. 8. 31. 07:46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의의 복은 앞의 복들을 논리적으로 뒤따르고 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야 하며’ ‘애통’해야 하며 ‘온유’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해하며 온유한 사람이 찾아야 할 것이 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이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온 세상은 행복을 바라고 구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온갖 활동과 야심과 모든 노력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비극은 그러한 갈구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 그런가?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고, 복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에 주리고 목말라서는 안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하고 있다.

 

행복과 복만을 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항상 놓쳐 버리게 된다.

행복은 항상 우리를 피해 가고 만다.

성경에 의하면 행복은 직접 구할 것이 못된다.

행복이란 항상 다른 것을 구하는데서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의보다 먼저 찾을 때는 이미 비참해질 운명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의를 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행복을 의 대신 취할 때는 행복은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환자는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의사가 그 고통만을 제거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매우 서투른 의사이다.

고통의 원인을 발견해서 치료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리석게도 바로 이러한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고 덤벼 든다.

오락과 쾌락의 장소로, 마시러, 위로해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문제는, 고통과 불행과 비참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찾기는 찾되 찾을 수 없는 어떤 유의 행복과 복을 찾으면서 한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 집회 저 집회로 돌아다니면서, 기쁨과 황홀감을 홍수처럼 채워줄 체험을 구한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구하고 탐하고, 항상 주리고 목마르다.

 

그래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체험에 주리고 목말라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과 복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복이나 행복이나 체험을 첫째 자리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

참으로 행복하고 복 되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은 의에 목말라한 결과로 하나님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목말라 해야 할 것은 의이다.

 

2.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나 도덕은 아니다.

세상의 평화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면서도 가까운 이웃에게는 불성실한 사람들이 있다.

의란 막연하게 존경할만한 어떤 태도도 윤리도 아니다.

 

본문에서의 의는 칭의 일뿐 아니라 성화도 포함하는 의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의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요, 죄를 제거하려는 욕구이다.

 

의는 먼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말한다.

심령이 가난이 무엇이며, 내부의 죄로 인한 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악한 세력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안다.

‘불순종의 아들 속에 역사하는 영인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 따라’ 행할 수 있음을 안다.

이 세상 ‘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여러 가지 일들에 이끌려 갈수 있음을 아는 고로

이제는 그것에서 해방되려고 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그의 지체 속의 다른 법’,

곧 자기도 모르게 그를 끌고가는, 이 악한 세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는 죄의 세력과 횡포와 속박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죄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뿌리가 깊다.

 

의는 또한 죄를 지으려는 욕망에서 해방되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성경에 비추어 자기를 검토하는 사람은 자기가 죄를 좋아하고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본다.

죄가 나쁘다는 것을 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것을 원한다.

 

지금 ‘의에 주리로 목마른 사람’은 죄를 지으려는 이 욕망을

자기 행동에서 뿐 아니라, 마음 속에서부터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죄는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성품을 오염시킨 주범이다.

기독교인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요약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우리의 자아(옛사람)와,

그 자아가 빚어내는 온갖 형태의 죄(그 행위)에서 해방되고자 소원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관심과 자만 자랑 그 모든 형태와 모양에서 헤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적극적으로, 성결해지를 소원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매일의 생활에서 팔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의 모든 행동과 온갖 생활과 활동에서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이다.

 

의는 인생의 최고 욕망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빛 가운데서 동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빛이시오 그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빛 안에서, 순결과 성결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이것을 동경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갈망과 욕망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복음서에서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반응과 친절과 동정과 민감한 성품을 보라.

원수들에 대한 반응과 그 원수들이 행한 것을 보라.

 

신약성경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거듭 났으며 그분의 모양과 형상을 닮아 새로 빚어졌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삶속에서 그와 같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의 최고의 욕망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3.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 의를 얻을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집착하는 세상적인 의 개념이다.

이런 의 개념은 바리새인 식의 개인의 자만이나 민족적인 우월감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 개념은 사도바울이 빌립보 3장에서 ‘분토’로 여긴 모든 것이다.

즉 온갖 자신, 자기에 대한 의로운 신념 따위를 말한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런 의에 대한 것일 수 없다.

그 까닭은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형태의 자기 신뢰를 부정하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우리의 궁핍의식을 말한다.

절실하고 고통스러울 정도의 심각한 궁핍의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나가는 어떤 감정이나 지나가는 어떤 욕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의가 ‘아침 구름’과 같이 한 순간 있다가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주림은 그것이 만족하기까지 계속되는 깊고 심오한 것이다.

주림은 고통과 아픔을 준다.

 

영적 주림과 목마름은 실제로 겪는 육체적 주림과 목마름과 같다.

그것은 계속 심해져서 사람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사람이 뭔가를 이룰려고 소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쉼이 없고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그는 큰일을 하며 꾸준히 애를 쓰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꿈을 꾼다.

그의 야망은 그의 삶을 정열로 불타오르게 한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사랑에는 항상 큰 주림과 목마름이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은 자기의 사랑의 대상과 함께 있으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고전적 형식으로 완벽하게 요약해서 표현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유명한 다비라는 사람이 말했다.

‘주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 알고 싶어 정말 주려 죽을 지경이 되어야 한다’. ‘탕자는 주렸을 때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다. 그러다가 그가 주려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절망상태가 되며, 주려 죽으며,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자기를 살려줄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갈구하는 것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는 것이다.

 

4. 주리고 목마른 사랄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인가?

 

행복하고도 행복하며 복이 있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인가?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욕망하던 것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의로 채워지지 못할 것이며 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주신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내가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우리는 배부를 것이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맨 먼저 채워주시는 것은 칭의이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와 죄책의 장벽은 제거된다.

우리는 그의 의로 채워지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은혜 아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칭의 받았으며

그가 이 순간 하나님의 존전에 의로운 상태로 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토플레디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율법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

내 구주의 순종과 보혈은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감추었다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령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신다.

그에 따라 우리는 이 세력과 오염에서 구원받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성화의 과정은 역설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동시에 완전해져 가야 한다.

완전한 동시에 계속 주리고 목말라 한다.

 

그는 의로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그는 더욱 주리고 목마른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복이다 이 일은 계속된다.

 

우리는 성화에 있어서 일정 단계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남은 생애를 이것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계속 변화를 받아 ‘하늘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나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하되 완전하지 못하다.

계속 주리고 목마르고, 채워지고 만족을 받는다.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약속이 영원 세계에서 완전히, 절대적으로 성취될 날이 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각 사람이 하나님 존전에, 허물없이, 점과 주름 없이 서게 될 날이 온다.

그때에는 완전한 몸으로 된 새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