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혜로운 자가 자랑할 것은 지혜이고, 용사가 자랑할 것은 용맹이고,
부자가 자랑할 것은 부함인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가 아닌가요?
지혜는 지식과 학벌을 총칭하고, 용사의 용맹은 힘이고 권력을 총칭하고,
부자의 부함은 재물과 소유를 총칭하니까요.
사람들이 일생을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와 힘과 재물은 세상이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만 있어도 자랑할 만하고 내세울만 한데
왜 하나님은 그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은 그 세 가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개인으로부터 오는 것이거나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고 한다.
내 것이어야 내 거라고 자랑을 하지요.
지혜가 과연 내 것인가요? 권력과 힘이 과연 내 것인가요? 재물이 과연 내 것인가요?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선한 관리자일 뿐이다.
그것이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처신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의 삶이 불편하고 고달퍼진다.
지혜를 잘못 쓰는 자들, 권력을 잘못 쓰는 자들, 재물을 잘못 쓰는 자들.
이들로 인하여 나라와 종교와 조직체들이 불행해지고, 본인들은 패가망신들을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들이 수갑을 차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교훈을 주는 데도 자기만은 예외일 줄로 안다.
잘못된 자랑이 멸망의 길을 재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또 이 세 가지를 믿고 하나님을 거역한다.
이 세 가지로 ‘악인의 꾀’를 삼고 ‘죄인의 길’로 가고 ‘오만한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잘 쓰면 참으로 좋은 것이 지혜이고 권력이고 재물이다.
자신과 이웃을 이롭게 할 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굳건히 세울 수 있다.
그것을 쓰는 사람의 문제이고, 쓰는 방법의 문제이다.
2. 하나님은 자랑할 것이 따로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먼저, 자랑할 것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지혜도 힘도 재물도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하신다.
어떤가요?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요?
(자랑하고 있지 않으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보면 된다.
지혜, 힘, 재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부족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청을 한다.
(호6:1-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오지도 않았고,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도 큰 차이가 없다면 심한 말일까요?
세상의 지혜와 힘과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힘쓰고 애쓰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하신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혜의 뿌리가 없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소홀히 하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고, 땅을 치고 통곡할 날이 오고야 만다.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오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꽤나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부어주시는 은혜로 채워지게 된다)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란다.
우리는 또한 말씀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알고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을 내 식으로 믿는 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려면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알게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길 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시 1편에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라고 했다.
(시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성경과 말씀공부를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하는 복을 주신다.
세상 지혜와 출세와 재물을 위해서만 달리다가는 하나님이 멈춰서게 할 날이 오고야 만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주기 위한 사랑의 채찍이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종교개혁은 세상 지혜와 권력과 재물로 썩은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한 채찍이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하나님은 이 개혁자들과 그 나라들을 축복하셨다.
다시 교회는 타락하여 카톨릭화 되어가고 있다고 탄식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시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혜와 힘과 재물에 의지하는 행태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도 세상 지혜와 힘과 재물에 의지하는 행태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할 수가 없다.
우리는 또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기 하게 된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드리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생활이 되시기 바란다.
염려하고 낙심할 시간에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시기 바란다.
아무리 못해도 아침 첫 시간은 꼭 하나님께 드리고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 전에 하루를 감사하며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편안한 잠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예배와 말씀공부와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기를 힘쓰자.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명철인 것을 기억하자.
(시119:98-100, 말씀을 가까이하면, 명철이 원수보다 모든 스승보다 노인보다 낫게 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지혜와 힘과 재물은 부메랑(자업자득)이 되어 돌아와 나를 망하게 하고 만다.
내 마음 중심에 내 영혼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다른 것을 모신 사람들은
멸망의 날을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삼은 백성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는가요?
(렘9:13-1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교회였고, 우리는 신약의 교회일 뿐이다.
이스라엘도 형벌로 다스린 것이 아니고 징계로 그들을 다스렸다.
3. 다음, 자랑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땅에 행하는 분인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행하시는 방식은 사랑만도 아니고 공의와 정의만도 아니시다.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철학이 만들어낸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오늘도 이 땅에 행하시는 분임을 깨닫고 자랑해야 한다.
정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공의는 그 의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과 공의로 줄여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속성은 불가분리의 속성이기 때문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최대의 균형을 이룬 곳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제물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이 실현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도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의 지체이니 더욱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는 데,
그의 자녀인 우리는 다르게 행한다면 언약관계라 할 수 없고 부모자녀관계라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마땅히 사랑과 공의로 행해야 한다.
사랑만 있고 공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역으로, 공의만 있고 사랑의 행함이 없다면,
하나님이 자녀로서 미숙한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에 장애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하고,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온전한 성숙)
세상에서 지혜와 힘과 재물을 사용할 때도 이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행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번영하는 사회가 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행하시는 방식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지혜와 힘과 재물을 올바른 방향으로 쓸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과 공의의 법도대로 살 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하나님을 알면, 내가 주인 노릇, 폭군 노릇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분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행하시는 사랑과 공의의 법도를 깨닫는 것은 하나이다.
하나님을 알고 법도를 깨닫는 것을 내 삶의 자랑으로 여기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이 일을 기뻐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4. 우리의 자랑하는 것, 추구하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남은 인생에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우리의 자랑, 우리의 탐욕스런 야망들이 달라질려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한 언약의 표징이다.
하나님은 항상 이 언약을 지키시는데 배신한 쪽은 항상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싫어하고 바알의 신을 섬기는 배신을 하였다.
중세의 카톨릭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의 재현이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다시 카톨릭화 되면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다수가 간다고, 주류가 간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25-26절을 같이 읽자
주님의 말씀이다.
마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언약의 내용을 상실하고 배신한 할례는 받지 않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외적인 할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롬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교인이 교인이 아니요 표면적 세례가 세례가 아니다.
오직 이면적 교인이 교인이며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들어있는 우상들을 탐욕들을 칼로 베어내는 것이 마음의 할례이다.
입은 주께 가까우나 마음은 주께 먼 사람들이 표면적 유대인이요 표면적 교인이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고
그분이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자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신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힘과 재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혜와 힘과 재물로 축복해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렘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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