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복수 / 박영돈목사

새벽지기1 2016. 9. 22. 07:20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복수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이 말씀은 우리가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 원수에게 더 뜨거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교묘하게 복수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면서 “이 놈 내가 네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얹어놓는 것을 아느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앙갚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그 음식과 물에 독을 넣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그런 해석을 반대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선함과 친절함으로 인해 원수가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껴 회개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숯불은 사랑의 행위로 인해 일어나는 자책과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원수에 대한 사랑이 원수를 감화하여 그를 회개로 인도할 수 있다. 원수도 친구로 변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수에게 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들이 수치를 느끼고 회개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의 선함으로 인해 원수가 우리를 더 우습게 볼 수 있다. 자신을 더 정당화할 수 있다.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더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대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이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도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달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혹시 어떤 자책을 느낄지라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자작 위로와 확신을 만들어내는데 능숙하다. 물론 원수사랑에 감동해서 변화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게 감동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교하고 복잡한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을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여기서 숯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숯불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종종 숯불은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뜨거운 숯불이 떨어지게 한다고 했다(시11:6, 140:10).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면 원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더 혹독하게 임하도록 선을 행하라는 뜻이 되기에 크리스천 정신에 위배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친히 원수를 갚으신다는 문맥과 더 잘 들어맞는다.

구약에도 이런 예들이 있다. 다윗은 계속 자신을 죽이려한 사울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 끝까지 그를 선히 대했고 하나님이 결국 사울을 심판하셨다. 우리가 원수에게 선을 행함에도 그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 그들의 악함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며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쏟을 이유가 더 확실해진다. 또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앙심과 복수심을 품고 원수에게 선을 베풀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회개한다면 그것은 최선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를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수가 회개하고 안 하고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들이 회개하든 말든 우리는 그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용서하고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의 좌와 잘못이 자동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온전한 용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잘못을 범한 이가 회개하지 않아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반쪽만 맞는 말이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았는데 용서할 권한은 하나님께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이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용서를 선언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다. 회개치 않은 사람은 우리의 용서를 오히려 짓밟아버릴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에게 네 죄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는 그 용서를 자기를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진귀한 용서를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용서를 그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을 회피하는 타협안이나 절충안으로 교묘히 이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는 원한과 복수심에 사로잡혀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용서를 빌지 않더라도 복수심과 증오를 버려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원수를 계속 마음으로 미워하며 욕하고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원수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자녀된 자들의 모습이다. 사랑의 영인 성령을 따라 행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의 자세인 동시에 하나님이 완벽하게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역사를 방해하게 된다. 악에 대응하여 우리도 악을 행하는데, 성령을 거슬러 행하는데 하나님이 누구를 심판하셔야 할까?

이렇게 용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을 복수심과 증오의 결박에서 해방한다. 우리 영혼 안에 퍼져있는 증오의 독을 해독한다. 원수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는 그 원수에게는 아무런 영향과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그 피해를 입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우리는 점점 영적으로 피폐해진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악과 싸우다가 우리가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다.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불의와의 싸움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범죄한 자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고 그를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정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더 성숙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더 효과적이게 된다. 악을 확실히 이기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악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성령의 온유함이 아니라 육신의 혈기를 따라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 보응의 원리를 따라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신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승리의 유일한 비결이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과 불의로 인해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수와 그 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원수를 복수심과 악으로 대응할 때 우리 삶은 비참해지고 그 악한 자와 똑같이 악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원수와 악을 선으로 대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수준으로 높아진다. 가장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된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된다. 원수가 없었다면 결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가진 자로 성숙케 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하신다.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앞에 은혜의 향연을 베푸시고 우리 잔이 넘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