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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영혼

새벽지기1 2016. 9. 9. 22:42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영혼

 

본문: 시42편 1- 11

 

18세기 미국의 청교도 설교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만족게 하는 유일한 행복이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온전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좋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자녀들, 또는 세상 친구들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사26:9)

 

18세기 북미 인디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역시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742년 6월 15일 화요일, 내 생애에서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에 대해 갈망했던 날이다. 정오 경에 나는 외딴 곳에서 달콤한 적막 가운데 나의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제가 오직 당신만을 갈망하며, 오직 거룩하기를 갈망한다는 거 아시지요. 당신이 저에게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제게 그런 마음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에드워즈, 브레이너드처럼 우리 보물이 천국에 있을 때, 우리 마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천국을 애타게 사모할 것입니다. 성숙의 과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천국의 거룩함에 대한 열망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본문 1,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참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사모, 앙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요, 관념과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온종일 주님을 바라는 생활을 합시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석방의 날을 기다리듯이

사병이 제대하기를 고대하듯이

굶주린 사람이 먹기를 기다리듯이

구치한 살림이 풍요하게 되기를 바라듯이

파수꾼이 새벽 날새기를 고대하듯이

어린아이가 그 어머니의 젖을 사모함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진리를 갈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잠시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음부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이 거기 계십니다. 미치도록 예수님을 사모하는 생활을 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사람은 누구나 목말라 합니다. 어려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우리 인간은 목마름으로 살아갑니다. 목마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목마름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육적인 목마름은 물질에 대한 목마름, 사랑에 대한 목마름 등 세상적인 목마름입니다. 또 하나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목마름으로, 하늘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찾는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이 세상의 목마름이 지나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욕심이 되고 정욕으로 변질되며 마음이 어두워지고 썩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너무 육적인 목마름이 지나친 것입니다. 목마름이 잘못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술판이고 도박판이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민을 가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과외로 인해 학교교육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실직자는 백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청소년 성범죄가 일본의 세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형수술이 발달하여 상당한 사람들이 예뻐지려다가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하는데 한 여대생은 턱을 잘라내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식물인간이 되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지역에는 여자들만 들어가는 전용 술집인 호스트 바가 무려 300여 곳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정말 잘못되고 있습니다.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이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도 무섭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너지고 양심이 무너지고 인격이 무너지면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죄악에 목마른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고, 폼페이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결과는 그 사람은 선택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충돌했을 때 롯은 물질과 향락과 음욕에 목말라서 소돔성을 선택하였는데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전과 기도를 목말라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말라 한 아브라함은 복을 받았습니다. 땅의 것을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무시하고서는 우리 인간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목마름보다 영적인 목마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영적인 갈급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심한 박해와 조롱과 멸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전을 사모하며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복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신령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잘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영적인 목마름을 가졌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육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도는 항상 영적인 목마름으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내 영혼의 목마름을 물질로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신령한 목마름으로 기도하고 목마른 사슴처럼 영적인 갈급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107:9)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 철입니다. 교미기가 되면 사슴의 몸에 변화가 찾아오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짝짓기를 위해서 광야로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습하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서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광야에 무슨 물이 있겠습니까?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다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시인은 광야에서 이렇게 쓰러져 죽어가는 수많은 사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모금의 물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목마른 사슴에게 한 모금의 물이 생명이었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한 번의 만남은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영혼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이 세상의 자원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채워지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육신의 것들이 있는데도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주님을 찾게 된 것도 물이 없거나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곤고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현실입니다.

쓰러져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사슴에게 한 모금의 물만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한 번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죽을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고 우리 인간의 존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인생에 큰 은혜를 입었을 때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목마르고 사모하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향해 깨뜨려지지 않은 마음보다는 죄 가운데 살아왔다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 안에서 주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들의 위대한 업적을 향하여 시선을 두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였던 그 사람의 마음에 눈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주님의 크신 사랑의 경험이 마르고 진리가 힘차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은혜의 감격이 사라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여러분 속에 간절하게 떠올랐던 적이 언제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 말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간절한 욕망,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도록, 이 비천한 인생의 마음에 주님 자신이 찾아와 주셔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의 빈 심령을 주님 자신으로 충만케 채워주시길 바라는 그런 목마름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내 마음에 오시도록 구해본 적이 언제냐고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당신과 사람 속에서 교통하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기쁜 일은 없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사랑가운데서 누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이 큰 사랑,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그 힘으로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죄가 많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비록 명백한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고 싶고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싶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하했던 세리(눅18장)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365일 교회를 드나들어도 한 번도 가슴이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 매주 예배를 드려도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한 적이 없는 사람, 매번 기도해도 마음속에 자신의 죄와 강팍함을 위해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 어찌 주님이 오시겠습니까?

육체는 병들지 않는 한 음식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병들지 않는 한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갈증이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세상의 쾌락과 향학을 좇아 죄짓고 사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런 것들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고백록 첫 장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 아래서 살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 시간은 항상 기다려졌고, 주님과의 만남은 내 영혼에 만족을 주었지만 더 큰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나를 이끌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기도하든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에 사무친 기도였고, 우리 마음으로 섬기는 그 섬김은 자신이 처한 삶속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섬김이었습니다.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은 더 귀하고, 깨뜨려지면 깨뜨려질수록 우리 안에 뿌리 내린 무한한 죄를 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게 되면 이런 감각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차가운 의무로 바꾸고, 주님을 향한 목마름은 이 세상에 대한 탐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주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사랑은 샘솟듯 솟아나는 그리움이고 사랑하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 될 때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그리워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참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어려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뵈옵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원수, 에워싸는 많은 환경과 두려운 이 벽들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위기 가운데 건져주시고 고난 가운데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이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목마름이 우리 안에 간절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생생하고 간절한 그리움들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에 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 결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 목마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없이 살아갔던 인생의 곤고했던 날들, 그 인생의 위기 가운데 나타나셔서 나를 그 곤고함 가운데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 주님께 돌아갔을 때 주님이 내게 베푸시던 그 탁월한 달콤함과 자비의 그 놀라운 은혜, 이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특별히 그 일을 많이 생각하고 묵상함으로써 가슴 속에 내려오게 하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인생의 많은 자원들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해결책은 오직 하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고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고 사람들은 나를 정죄할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마음, 인생의 소망을 세상 자체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좌와 그 영광에 둔 성도의 그리움,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살면서도 어찌하든지 영혼으로 이것을 넘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고자 하는 사람, 그분이 있음으로 행복하고 자신이 이 땅에 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갈망으로 꽉 차있는 마음,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부족한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이 고라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그 큰 능력으로 주께서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던 원수들을 멸하시고 지극한 영광 가운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고라의 자손이 다시 예전에 섬기던 그 성소로 돌아가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충만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주님 안에서 변화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성도가 성장을 합니까?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성장에 대해 목말라 하는 사람이 성장을 합니다. 그냥 그렇게 주일 하나 잘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신앙인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목말라 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합니까? 부흥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저 밤낮으로 "하나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교회의 황무함을 보시옵소서. 부흥의 불길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바람 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교회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 이런 부흥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목마름을 사용하셔서 부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영혼을 살립니까? 영혼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을 대하고도 그저 "저건 남자고 저건 여자고 - 야, 멋지네, 예쁘네"하며 아무런 주림과 갈급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면 눈물이 흐르고 그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고 불쌍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영혼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낙스는 하나님께 기도 할 때마다 "주님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존 낙스와 같은 이런 갈급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가장 강력한 공동체는 목마름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건 조직이건 목마름이 없는 공동체는 오합지졸에 불과 합니다.

 

옛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이 생각만 하는데 그분들은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항상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갈망하는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쓰레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이 땅과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겠다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목마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께로 나아갑니까?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배가 부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고 뭐고 필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 합니까? 목마른 사람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말씀하셨는데 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까? 아쉬운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자꾸 위기를 주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갖게 하시려는 까닭입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하고 납작 엎드리라고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크게 쓰시기 위해서 시시 때때로 그들에게 목마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세상 사람들의 복은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복은 주리고 목마름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목마르고 주린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하는 갈급함을 늘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주리고 목마름을 가지고 나아 갈 때에 모든 것들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모라비안 교파를 창시한 분인데, 신분이 백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들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복음을 위해서 맨발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다 버리고 복음을 외치면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까?" 그때 그가 대답하기를 "내 안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렇습니다. 목마름이 있으면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가요하기 전에 그 사람 속에 타는 목마름이 있다면 가만히 놔두어도 헌신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꾸 목말라지자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계속해서 마음이 바짝 바짝 마르고 목마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데 나의 꼴은 이게 뭔가? 하는 목마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더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더 많은 헌신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목마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목이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늘 하나님께 목말라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죠.

 

시편 42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요단강 건너 마하나임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 주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지은 시를 고라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수집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저는 이 한 편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아들이 반역을 하여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주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누리던 그 호화롭고 아름다운 자신의 왕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앉아 있던 보좌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어렵고 힘든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어야 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고 있어야 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목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는 거치른 광야에서 자기 한 몸 의지 할 곳 없어서 이리저리 쫓기고 다닐 때나 왕이 되어 호화로운 왕궁에 거할 때나 아들에게 쫓기어 비가 내리는 밤에 맨발로 도망가야 했던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께 목말라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물이 떨러지게 되었습니다. 물을 찾아 헤매다가 짐 꾸러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혹시 물이 있는가 싶어가 뛰어가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엄청나게 값진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나그네가 외친 한마디 "겨우 진주야!! 겨우 다이아몬드야!!"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필요합니다.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나 진주가 시시해 보이는 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도 시시해 보이는 법입니다. 예배에 목마른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도 시시해 보입니다. 기도에 목마른 사람은 아무리 재미있는 T.V 프로그램도 시시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에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에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혼 구원에 목이 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새비전 교회의 부흥에 목이 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6-1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훌륭한 군인이었으며 훌륭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백악관에 있을 때 백악관 출입 기자들과 간담회나 회견을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기자 회견이 끝난 후 기자 한 사람이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각하, 각하는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머리입니까?" 이 질문이 떨어지자 장내엔 폭소가 터졌습니다. 이유는 아이젠하워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머리와 이마와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대머리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대통령이 잠시 후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 아침 백악관에 다시 와서 내가 세수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으로 씻는 부분까지가 얼굴이고 씻지 않는 부분은 머리입니다." 기자실 안엔 다시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한결같이 대통령의 여유 있는 유머에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유가 없습니다. 더욱이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죽기 아니면 죽이기를 반복하는 살얼음판입니다. 길거리에 차를 세운 채 두 사람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30여대의 자동차들이 밀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갑자기 뒤따라오던 차가 끼여드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날 뻔했을 뿐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차를 세우고 넥타이까지 맨 신사들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빨리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회복해야합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주변의 조소가 빗발칠 때 이일 저 일로 마음이 상처받았을 때, 그리고 절망과 낙심이 밀려오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장엄한 노래를 읊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믿음 때문이었음을 본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정황과 해결법을 본문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5절 끝을 보면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찬송한다는 당당한 고백이며 노래인 것입니다. 언제, 왜 시인은 찬송하기로 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 상하고 낙심될 때입니다.

4절 끝을 보면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라고 했고, 5절을 보면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했고, 6절을 보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라고 했고, 9절을 보면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라고 했고, 11절에서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마음이 상했다, 낙망되고 불안하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행동은 결정합니다. 영혼은 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에 따라 사건이 결정되고 인생이 결정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땅위를 달리는 자동차나 기차의 경우 하루아침에 불쑥 뛰쳐나온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사고의 산물인 것입니다. 만일 자동차나 비행기를 발명한 사람들이 사람은 절대로 하늘을 날 수 없다든지, 시속 200㎞의 속도로 땅위를 달릴 수 없다는 자기암시에 빠져 있었다면 비행기나 자동차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절망, 고통, 실패, 좌절, 불안, 이런 것들은 없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밀어닥치는 그것들을 피할 수 없게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올 테면 오라. 나는 너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런 것들이 겁 날리 없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공포자체이다."

브리스톨이 쓴 「적극적 사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이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질 꺼야, 나는 끝났어, 나는 손들었어"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슬픔, 괴로움, 번민, 실패, 아니면 건강, 재산, 행복, 성공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 건강, 행복, 부귀를 마음먹고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현실로 다가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지만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잠언 16:1을 보면 "미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했고, 16:3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9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고 성취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달은 시인은 고통과 아픔과 상처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찬송하겠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2. 도우심을 받았을 때입니다.

5절을 보면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시인의 두 입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괴롭고 힘들 때도 찬송하고, 도우심을 받았을 때도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고 괴로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 도우심 때문에 다시 찬송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절에서 "도우심을 인하여 찬송한다"는 것은 도우심 때문에 감사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저서「뇌내혁명」속에서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처했다 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미래의 꿈이나 희망 혹은 인생의 계획 등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다. 심한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은 긍정적 발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장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끙끙 앓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젊었을 때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이나 근심을 돈주고 사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돈을 줘서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걱정, 근심, 염려들이 쌓여 만드는 스트레스는 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8월초 두 가정이 동해안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두 가정이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두 가정 모두 남매를 둔 가정이었습니다. 애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목적지를 같은 곳으로 정했고, 각각 승용차 편으로 떠났습니다. 한창 휴가철이어서 목적지까지 열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두 가정이 무덥고 지루하고 짜증나는 열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낸 상황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가정은 부부가 서로 나누어 운전을 합니다. 미리 준비한 카셋트 테이프로 찬송을 듣고 설교를 듣습니다. 뒷좌석에 탄 두 아이들에게는 상금을 걸고 성경구절 암송을 시킵니다. 준비해온 간식이며 음식을 나눠 먹습니다. 네 식구가 돌아가며 노래자랑을 하고, 끝말잇기 게임을 하고, 엄마 아빠 어렸을 적 얘기, 아빠 군대가서 기합 받은 얘기, 엄마 아빠 연애하던 얘기 등으로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피곤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열 시간이 언제 지났나 싶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또 가정은 달랐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땅 덩어리도 게딱지만한 나라가 웬 놈의 차는 이렇게 많이 만들어 개나 고양이나 차 몰게 만드는 거야. 차가 밀릴 땐 톨게이트를 확 열어서 차가 쑥쑥 빠지게 해야지 표 빼느라 밀리고 돈 내느라 밀리고... 한가해진 다음에 휴가 가자니까 여편네가 이 주간에 꼭 함께 가야 된다고 고집 피우는 바람에 사서 쌩 고생하게 됐다"며 신경질을 냅니다. 그쯤 되면 아내가 곁에서 "여보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당신 고생이 크구려. 피곤하면 길가에 세우고 잠시 쉬었다 갑시다. 애들아 아빠한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드려라"라며 아양을 떨고 남편어깨라도 주물러 준다면 성질 급한 남편도 수그러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구려. 우리만 휴가 떠났수? 수만 명이 같이 차 몰고 가는데 뭘 그렇게 유세를 떠세요. 그리고 일 년에 한번 애들 데리고 가는 건데 기분 좋게 가면 어디가 덧이라도 나우?"라며 바가지를 긁어 댔습니다. 차안에서 부부가 싸웁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이 웁니다. 이 가정의 올 여름휴가는 지옥여행이었습니다.

이들 두 가정은 식구도 넷씩이었고, 자동차도 같은 종류의 차였습니다. 목적지도 강원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떠난 시간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 가정은 축제가 되게 하고 한 가정은 지옥여행이 되게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주어진 부정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신앙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싸운 가정은 힘들고 짜증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이원설 박사와 강헌구 박가 두 사람이 함께 쓴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일화들이 적혀있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세계 모든 가정 모든 책상 위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컴퓨터가 놓여있는 세상을 만들겠노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나는 세계최고의 이야기꾼이다"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말하곤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우리 대학은 서부의 하버드"라고 말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길엔 어려움도 기쁜 일도 있습니다. 낮도 있고 밤도 있습니다. 누가 성공하고 누가 웃을 수 있습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비관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어둡고 힘든 절망을 바라보지 말고, 아침햇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칠흙 같이 어두운 밤하늘이라도 자세히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 한 두개의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1절을 보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라고 했고, 2절에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했고, 8절에서는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라고 했고, 9절에서는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신관, 하나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밝혀 줍니다. 외롭고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행복하고 기쁠 때도 주를 향해 찬송합시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시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

세상의 가치는 오래지 않아 바래지고 순간의 만족이나 기쁨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영혼의 목마름은 우리를 늘 따라다닙니다. 영원한 생명 되신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 13, 14)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사모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가 평생 주님만을 사랑하며 고난을 당할 때에도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소서. 저는 지금 영적으로 배가 고픕니다. 형식적인 교회생활과 의례적인 신앙생활에 완전히 지쳤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만나기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제게 더 큰 사랑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제가 항상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시며 동시에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출처 : 한태완 목사님 설교자료
글쓴이 : 복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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