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쉐퍼는 신정통주의(칼 바르트)와 외형적인 성공(빌리 그레함)의 유혹을 막아 주었다 / 헤럴드 브라운

새벽지기1 2016. 7. 20. 07:39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몇 년동안, 복음주의 학계는 두드러지게 기세를 올리는 자유주의에 부딪혀 초보적인 학문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럴즈음 갑자기 칼 바르트에 의해 점화된 신정통주의라는 새로운 운동에 일격을 당한 자유주의 신학을 망연자실 보게 되었다.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바르트 신학에서 긍정적이고 정통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기뻐하면서, 바르트의 영향력이 1950년대에 유럽에서 이미 쇠퇴한다는 것을 빨라 알아 차리지 못했다.

 

물론 쉐퍼만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 유일한 보수적 개신교도는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코넬니우스 반 틸도 바르트주의를 가리켜 일찍이 그레샴 메이천이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한 기독교와 다른 종교라는 말로 혹평했다. 1950년대 말엽에서 1960년대 초까지 라브리에 여행한 사람들이라면 쉐퍼가 정통주의에 훨씬 더 위험하게 여겨지는 불트만을 비난한 것보다 더욱더 바르트를 반대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다수의 복음주의 학자들에 의해 바르트 신학이 재생되고 있음을 볼 때, 쉐퍼의 경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를 반대했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를 확신하고 있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성경의 절대무오성과 복음서의 역사성,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사람들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근거하다고 주장한데 있었다. 바르트의 주장을 인정하자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그는 기초가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그를 신학의 길잡이로 여기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날에도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당대의 불신앙에 대한 답으로서 바르트를 찾고 있는실정인데, 쉐퍼가 이미 30년 전에 바르트 신학의 위험성을 알았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쉐퍼는 역사적 기독교와 신정통주의를 명확히 구분하였는데, 그와 같은 구분 자체는 신정통주의에서 귀중한 가치를 찾으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더욱 충격을 주었던 것은 쉐퍼가 빌리 그레함과 그의 대중 복음운동의 십자군으로 대표되는 현대 최대 규모의 복음운동의 성공적인 개가마져 실패로 여겼다는 것이었다. 쉐퍼에 따르면 대중 복음운동의 십자군이라는 사람들 중 얼마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바르트가 그의 인격적인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을 건전한 기초 위에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면, 빌리 그레엄 역시 그가 건전한 기초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쉐퍼가 지적한 바 상층부”, 즉 역사와 이성에 대한 적당한 보증도 없이 감정적인 결신을 요청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구조물을 구축할 수 없었고 가짜 확신만을 양산해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중 복음전도 집회는 대중 매체와 겉치레 장식에 의존한다. 쉐퍼는 선한 감정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신앙의 확고한 기초에 따른 결신요청을 강조한다. 빌리 그레엄이 회심토록한 많은 사람들이 쉐퍼가 훈련시킨 사고의 학교를 거쳐갔다는 사실은, 분명히 쉐퍼야말로 오늘날 복음전도 운동에 대해 부가적인 힘과 요소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 레인 데니스,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사상, pp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