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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증 (6/10) - 너무나 느긋하신 예수님

새벽지기1 2016. 7. 13. 07:38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오히려 미명(未明)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1:32-39)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사신 예수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삶을 사신 유일한 분이다. 그럴 수 있었던 첫째 까닭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 본체이셨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그분의 본을 따라 살기로 노력해야 한다. 이는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신자더러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하나님도 당신께서 거룩하고 온전하니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하라고 수차 말씀하셨지 않는가?  

그런데 과연 이것이 가당치나 한 말인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수준에 도달하기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신적인 능력을 매번 발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거나 복음을 선포하며 가르칠 때는 신적 권능을 확실하게 내보이셨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때는 그야말로 그분도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었다.

그분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음도 바로 이런 맥락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분이 인간으로 사는 동안 우리처럼 많은 실수와 허물과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분도 시공간에 제한되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었으면서도, 인간으로 마땅히 살아야 할 완전한 삶을 사셨음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그분 안에서 상호 모순 충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역사한 것은 정말로 성삼위 하나님만의 신비와 섭리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서 각각에 대해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있는 성격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으로서 사셨다는 점이다.  정말로 우리와 동일한 조건과 상황에서 살았다. 우리 또한 동일한 조건과 상황에서 그분대로 살 수 있음을 완전한 선례(先例)로 보여주시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적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본문처럼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또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했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한 하나님으로써의 권능만 드러내려면 기도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거기다 항상 기도함으로써 조급증도 완벽하게 다스렸다. 그분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재촉하지도 않았고, 말세에 모든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기질적 조급증은 아예 없었으며, 또 조급증으로 인해 사랑하는데 실패하지도 않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그분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셨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재촉해도 카이로스의 때에만 행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가장 대표적이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을 행한 후에야, 그것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할 수 있음에도 아무 저항 없이 유대 관원들이 당신을 체포해 가도록 허락하셨다. 3년의 공생애 동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당신께서 성육신한 것은 물론 이 땅에서 베푼 이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천국복음의 내용과 또 어떻게 해야 죄인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등등을 제자들로 완전히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만약 공생애를 시작하자 곧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면 지금의 신약성경은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며 그분 또한 단지 천사나 마술사로만 기억되었을 것 아닌가?  

요컨대 그분은 인간 예수로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가 온전히 때가 차면 오직 하나님이 시킨 일만 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주님을 닮아 가장 그분답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은혜롭고 신비로운 역사는 물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을 가장 크게 훼방하는 조급증을 없애는 것이다.
  
일부러 늦장 부린 예수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정확히 맞춘 것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일부러 늦장을 부린 것 같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우선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심부터 그렇지 않은가? 인류가 타락한 이후 수천 년이 흘렀고,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 죄악으로 온갖 힘든 일을 겪은 후에도 당신의 계시는 사백년이나 침묵했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때가 차매”(갈4:4)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완벽한 때라는 것이다. 그전에 왔다면 하나님마저 조급증을 부렸다는 의미가 된다.

거기다 인간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일부러 늦장을 부린 것 같은 경우도 분명 있었다. 예컨대, 가나의 혼인 잔치 때에 엄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해도 곧바로 이적을 베풀지 않았고(요2:1-12),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낼 때는 나흘이나 지체했고(요11장),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갈 때도 중간에 혈루증을 앓는 여인 때문에 지체되었다.(눅 8:41-56)  

그렇게 늦장을 부려도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정확하고도 완벽하게 이루셨다. 나사로의 경우처럼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 되살리어 더더욱 당신의 권능을 여실하게 드러내보였다. 마치 액션영화의 히어로들이 맨 마지막에 나타나 단번에 악당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어떤 어려움도 손쉽게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까 주위 사람이 재촉할수록 짐짓 늦장 부리면 자신의 명성이 더 높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예수의 형제들이 이와 비슷한 몰이해(沒理解)에서 그를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나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7:1-6).    

초막절이 다가와 형제들이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한 이유는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왜 가만히 묻혀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 이적을 행하여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한다. 주인공으로써 일부러 늦게 나타나 더 생색을 내라고 권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능력을 보이려면 사람들 앞에 드러나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들도 그를 믿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기들 형이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인지는 전혀 믿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자기 명성을 높이려는 줄 오해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도 주님은 일부러 늦장을 부린 것 같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8,9절) 그렇지만 결국은 예루살렘에 가서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고 나면서 소경인 자도 고치셨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셨다. 완벽한 때와 장소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하셨다. 사람들이 독촉한다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일부러 늦춘 것은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제한된 지정의를 가지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분의 말씀 그대로 당신의 때가 아직 안 되었을 뿐이다.

드러난 영광은 누구의 것?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과 이적은 오직 당신의 당신 됨을 증거하려는 뜻이었다. 당신이 성육신한 하나님 본체라는 정체성을 모두가 보고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지닌 이중적 정체성 가운데 신적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무리 신성과 인성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보내신 이 즉,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었지 이 땅에 인자로 와있는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의 인성 부분 즉, 인간적 명예를 높이려고만 했다면 어떻게 하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다 들어주면 된다. 그것도 그 즉시로 그 현장에서 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계속 유대인들을 먹여주고, 또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불러서 로마군을 물리쳐서 솔로몬 왕 때의 영광을 이스라엘에 재현해 주면 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게 할 수 없다고 만류했을 때에도 사단에게 넘어가지 말라고 야단치는 대신에 참으로 의리가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 모든 현실적 요구는, 심지어 제자들의 것마저 외면했다. 인간 예수는 철저하게 멸시와 핍박을 받은 길을 택하였다. 반면에 구세주 하나님 예수만 드러나게 했다. 그것도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는 모습으로만 말이다.

지금 예수님이 육신의 형제들에게 대답한 내용을 보라.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명절은 일 년에 몇 차례 정해져 있는데 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에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형제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때와 무관한 때를 말한다. 따라서 자기들이 가고 싶을 때 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인간들의) 때는 늘 준비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모르는 이는, 아는 이도 때로는 그분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일의 때를 자기가 정한다. 바로 앞의 글에서 설명한대로 예수를 믿기 전에 범사를 외양으로만 판단하여 살아가는 방식이다. 구태여 하나님께 물어서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바로 그 때에 그러지 못하면 조급증이 앞선다. 또 그 조급증은 곧바로 다른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인자로서 예수님이 당신을 드러내려면 손쉽게 당신의 능력을 동원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초점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동생들의 요구처럼 자신을 드러내려면 가능한 일찍 예루살렘에 올라가 명절이 시작하자마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적을 일으켜 보여주면 되었다. 사람들에게 조급증이 생기지 않게 해주면 그만이다.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한국에선 정치인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당장에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정책만 남발하고 있다. 그 재원 마련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입고 싶은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허리띠 졸라매며 먼 장래를 내다보자고 했다간 표만 떨어진다. 선거에 뽑혀 지도자가 되겠다는 인물이나,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신성한 권리를 가진 국민들이나  조급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예수님이 너희 때는 늘 있다고 하면서(6절)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고 답한(8절) 중간에 한 말씀을 더 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7절)

지금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형제들이 비아냥거린 것을 계기로 세상 사람에 대해 일반적인 경고를 발하고 있다. 단순히 그들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앞뒤 문맥을 살피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모르고 아무 때나 무조건 자기 기분대로 행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다. 성격이 불같은 자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해 조급증 증세를 드러내는 이들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의 때를 순종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 모든 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에 대해서도 외모만 보고선 갈릴리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가 없으니 신성모독 죄로 죽이려 조급하게 덤비는 유대관원들이 악한 것이다.

예수님은 조급증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 예수는 우리가 본받지 못하지만 인간 예수는 따를 수 있다. 특별히 본받아야 할 바가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모습이다. 조급증을 없애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비결도 본문처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조급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전날 저녁에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었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일 정도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마도 밤늦게 자리에 들었고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날 아침 해도 뜨기 전 아직 어두울 때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예수를 만나러 다시 모였는가 보다. 아마 아직 치유를 받지 못한 환자나 귀신들린 자들이 남았던가 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어서 빨리 기도를 마치고 동네에 와서 사역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다. 당신의 말씀대로 머리 둘 곳도 없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침을 받고,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일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는 로마 원형경기장의 관중 수만큼 모였지 않는가? 역사상 최초의 초대형 복음전도 집회였다.

너무 바쁘다 못해 지금 같이 기도할 짬도 얻지 못할 판이었다. 그분은 항상 세상의 모든 아픔, 슬픔, 갈증, 허망, 혼돈, 모순, 추함, 더러움, 고집, 완악, 교만, 위선, 거짓 등에 휩싸여 지낸 셈이다. 하루 종일 세상의 소음을 들으며 살아가야만 했다. 실제로 그 모든 소음들을 평강함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당신부터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았다. 오직 혼자만 있는 곳이다. 제자들도 따라가지 못하는 곳이다. 세상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그 모든 소음은 당신의 등 뒤에,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그 동네 안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오직 당신 혼자서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채로 성부 하나님과 개인적인 대면을 위해 기도처로 가신 것이다.

바꿔 말해 그분은 세상의 소음을 들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오늘도 당신의 주위에 모일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또 모든 치료와 가르침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길 간구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당신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하는데 더 우선을 두었다는 뜻이다.

기도의 중점을 세상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는 데에만  두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지정한 때에 그분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당신의 현실적 문제를 들고 나와서 당신이 정한 때에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음 중에 휩싸인 우리의 기도

반면에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기도 중에도 세상의 소음에 싸여서 어쩔 줄을 모른다. 기도처마저 한적한 곳이 아니다. 기도굴이나 독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자의 심령에 온갖 세상의 잡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도하면서 이런저런 딴 생각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가 간구할 일들만 즉, 세상 속에서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만 들고 나와서 따발총처럼 쏟아놓고는 기도를 뜨겁게 했다고 만족한다는 것이다. 소음을 차단하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그 소음을 그대로 옮기려 든다.

아무리 새벽 일찍 일어나 독방에 들어가 TV나 핸드폰 다 끄고 기도했어도 한적한 곳이 아니다. 세상과 단절하고서 그분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구별된 방식으로 그분과 교제하려는 의도가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서 하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세상의 소음을 없애고 안일만 얻으려고 하나님을 세상 소음 속으로 끌어넣으려 든다. 세상 소음을 탈출해 하늘나라의 고요 가운데로 들어갈 의도가 없다. 세상 소음을 완전히 차단한 한적한 곳으로 가시는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을 완전히 시끄러운 곳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떠했는가?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도를 하였다. 조급증을 없애는 기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하기 전부터 실은 그분에게 조급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라면 틀림없이 어저께 다 고쳐주지 못했던 나머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또는 천국 복음에 대해 더 듣고 싶었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 전날 저녁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고 다시 다음날 아침에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 앞에는 우리가 보기엔 메시아로서 꼭 해결해야만 하는 바쁜 일들이 눈앞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조급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하나님과 일대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안 되었는데 인간이 아무리 아등바등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자기만 손해이지 않는가?

세상의 잡다한 일을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때로는 출근 길에 잠시 교회에 나와 아주 급한 일만 허급지급 간구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바로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 그분과만 둘이서 한적하게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하는 주변 상황의 조용함이 아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기도할 수 있다. 기도자의 영혼에 세상 소음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가장 먼저 자신의 죄부터 회개해야 한다. 또 찬양과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에 평강으로 채울 필요도 있다. 요체는 세상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그분과 만남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급증을 없애고서 그분의 때만 기다리는 자세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기도자는 하나님에게 매번 빚 갚아라고 독촉하는 빚쟁이가 될 뿐이다. 그럼 하나님도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런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지 않겠는가? 가만히 따져 보라.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는가? 누가 빚을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누가 갚아야할 책무가 있는가? 그럼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가?

너무나 조급하신 예수님

조급증에 대해 신자가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예수님이 항상 느긋하셨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조급하게 행동하신 적도 많았다. 그것도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말이다.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상들을 쫓아낸 사건이나,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면서까지 야단 친 것들을 보면 항상 온유한 것은 아니었지 않는가?

그분의 조급하심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만난 사건에서 더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 3일이면 된다. 사마리아인들을 상종도 않은 유대인들은 둘러서 엿새 길을 가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를 가로 질러서 갈릴리로 행했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려는 조급증이 아니었다.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 불쌍한 여인을 만나 영원한 생수를 마시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4:34-38)

주님은 영적인 추수에 관해선 단 한시도 지체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양식은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다. 영적 평강이 완전히 고갈된 한 여인을 구원하여서, 그녀로 하여금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메시아를 만나러 몰려 나왔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추수하라고 명했다.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요, 또 마음 밭에 복음의 열매가 이미 생긴 그 여인이 자신의 씨앗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뿌렸던 것이다. 이런 추수를 위해 넉 달이든 하루든 기다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는 이마다 어떤 형태로든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경우에도 예수님은 기도할 짬도 없을 만큼 사람들의 요구에 시달렸다. 분명히 그 동네에서 더 사역할 일들이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단 둘만의 교제를 마치고난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했는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오직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다.

그 동네 사람들의 당장의 급한 사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물론 그 동네는 전날 밤에 복음을 충분히 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의 이 땅에 오심은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전도가 목적이었다. 치유는 그 목적을 이루는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사람들이 당신을 찾는 이유가 어제 못 다한 치유와 도움을 달라는 것인 줄 당신께선 이미 아셨던 것이다. 대신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선 그분은 너무나 조급했다. 한 치의 주저함이나 나태함이라곤 없었다.  

주님이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복음 전파에 조급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님 나라를 씨 뿌리고 열매 맺는 일에 비유하면서도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4:29)고 했다. 복음을 전하고 추수하는 일에는 절대 느긋하게 행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주님의 조급증이 드러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실은 동일한 이유와 근거에 기인하기에 동일한 조급증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34-37 & 42)  

종말에 대한 조급증이다. 오늘 내일 날짜를 정할만큼 당장에 임박했다는 것이 아니다. 언제인지 모르기에 절대 여유 부리고 있을 짬이 없다는 면에서 조급증이다. 주님은 바로 이어서 착하고 악한 두 종의 비유를 들어서 그 조급증을 풀어 설명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48절)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놀다간 주인이 와서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律)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51절)고 엄중히 경고했다.  

지금 예수님이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더러 구원 받은 보상으로 열심히 전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주님은 단 한 명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시려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영혼 모두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당신의 그런 큰 사랑과 안타까움이 복음 전도와 종말에 대한 경고에는 단 한 치의 지체함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이 아니고는 언제나 느긋함으로 대하셨다. 아침부터 당신을 찾는 이들을 당신의 등 뒤에 그대로 버려둔 채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을 발걸음을 재촉하셨던 유일한 이유다. 그분의 이런 조급증과 동시에 느긋함이 바로 우리가 그대로 따라 닮아야 할 부분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39,40)

우리의 조급증은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닮아 조급증을 없앨 수 있는가? 기도하면 되는가?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개인적 교제만 나누면 되는가?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단지 기도에만 집중하면 자칫 본질을 놓치고 기도라는 방법론에 머무를 수 있다. 스스로 경건해지는 영적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다. 신자가 경건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학생이 공부하지 않으면 학생이 아니듯이 구원 후에 신자로선 너무나 마땅히 할 바다.  

그 대신에 주님처럼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데 조급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느긋해져야 한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이유도 자기가 꼭 해야만 하는 그분의 일을 깨닫는데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그 일을 행하면 된다. 그 일을 행하는 완급(緩急)의 템포는 하나님이 정할 뿐이다. 거기다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 신자에게 발생하는 나머지 일들은 당연히 그분이 다 책임져 줄 것 아닌가?

따라서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세상의 소음을 일단은 차단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조용히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자기에게 닥친 문제, 질병, 환난, 상처 등을 주님의 치유를 받아 해결하려고만 기도하면 그 전부가 자기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지 않는가? 그런 문제들은 자신의 소원하는 바대로 그냥 조용히 아뢰면 된다. 그것으로 끝이다. 기도에서 더 중요한 사항은 그런 문제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며, 그 문제들 안에서 신자가 따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행하는 것은 신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인간 예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구세주 예수의 영광만 드러나길 소원했던 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의 안일과 형통만 구하면 세상에서 자기만 앞세우는 일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겉모습이 어떻게 되던 오직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만 드러나길 소원한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 조급해지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증거되는 것이 삶의 유일하고 절대적 목표인데, 어찌 초조하고 염려할 필요나 이유가 있겠는가?  

요컨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는 결코 조급해질 수 없다. 무엇보다 모든 일을 그분이 알아서 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데, 아니 현재 직접 체험하고 있는데 어떻게 조급해지겠는가? 엄밀히 말해 조급증은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그에 묶여 급급하기에 조급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신자임에도 눈에 보이는 일들만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해결 받겠다면 마찬가지로 조급해진다. 빚진 자가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평생 못해 보고, 아니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일생이 끝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