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성욱교수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 / 정성욱 교수님

새벽지기1 2016. 6. 28. 22:09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

존 칼빈 하면 우리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자들에게는 정말 큰 스승입니다. 16세기 중세 말기 혹은 근세 초기라는 척박한 시대,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절대 권력이 지배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믿고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해 싸운 실로 우리의 위대한 선배입니다. 칼빈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가 지나칠 정도로 헌신적인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가톨릭에 빠져 있던 상황을 바울이 유대교에 빠져 있던 상황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의 미신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인위적인 신앙 속에 방황하던 칼빈에게 루터의 복음적인 저작들이 소개되면서 그는 복음과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게 되고, 참된 교회와 진리를 위해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워야 겠다는 결단과 헌신을 가지게 됩니다. 칼빈의 강요와 주석을 읽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 복음 진리를 변증하려는 특심한 열망, 비진리와 대적자들을 날카로운 지적 메스로 파헤치는 냉철한 지성, 그리고 복음 진리를 따라 삶을 정돈하려는 불타는 열정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칼빈이 가톨릭과 교황주의를 비판하는 강요의 글들을 읽으면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의 분석과 비판은 예리하고, 철저하고, 에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거짓과 비진리가 진리로 인정되는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가 그렇게라도 철저하게 비진리를 파헤지고 비판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복음의 축복이 가능했을까요?

18세기 초 북미 뉴잉글랜드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가지 면에서 칼빈을 닮아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칼빈과 같은 명석한 두뇌의 사람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칼빈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푹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이 당대의 루터와 선대의 교부들들과 어거스틴 등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것처럼 에드워즈 역시 16-17세기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그리고 교부들과 어거스틴 등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빈이 크리스천 휴머니스트로서 당대의 철학과 일반 학문을 통달 했던 것처럼, 에드워즈 역시 크리스천 필로서퍼로서 당대의 경험론 철학과 계몽주의 사상을 통달 했습니다. 칼빈이 가톨릭의 신학적 오류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파헤친 것처럼, 에드워즈는 반어거스틴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신학적 오류를 밝히 드러내었습니다.

무엇보다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오류가 없는 절대 권위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자신을 헌신한 것처럼, 에드워즈도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절대적 표준이라는 복음적 성경관을 지탱했습니다. 칼빈이 성령님의 비밀하신 역사 즉 조명과 각성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깨닫거나 실천할 수 없다고 믿었듯이, 에드워즈 역시도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가 없이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이 유대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강하게 신앙의 실천과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였듯이, 에드워즈 역시도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 속에서의 실천이 신앙의 본질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이 예수 제자의 길임을 칼빈과 에드워즈는 깊이 확신했고 또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정황은 상당히 달랐지만 두 사람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바는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에드워즈는 칼빈과 선대 청교도들의 신학적 통찰을 계승하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독특하게 주신 부분들을 아름답게 계발했다는 것입니다.

1. 에드워즈는 칼빈이 개관적인 복음진리를 확립하면서 비교적 큰 관심을 두지 못했던 그리고 청교도 신학의 중심 화두였던 신앙의 체험적인 측면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 사라 에드워즈가 프로토 캐리스매틱이었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신학은 오순절과 은사운동이 만연된 20, 21세기에도 빛을 비추어 줍니다. 참된 은혜의 체험과 참된 신앙감정에 대한 바른 안내를 제시합니다. 이 부분은 특히 한국 교회의 갱신과 개혁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2. 에드워즈는 칼빈이 교회개혁에 정열을 쏟으면서 놓치고 있었던 교회의 선교적 측면을 강조해 주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고, 선교사 브레이너드의 전기를 쓰면서 선교적 열정을 강조했습니다.

3. 교회의 제도적 개혁보다는 개인의 영적 각성과 부흥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평생 유지했습니다.

4. 칼빈보다 더 폭넓게 일반 학문과 철학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는 개신교의 아퀴나스라고 불릴만큼 위대한 지성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철학과 신학을 자신의 인격 속에 통합한 어쩌면 어거스틴의 기독교적 플라톤주의, 아퀴나스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칼빈의 신앙과 신학을 사랑하는 복음주의자라면, 에드워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드워즈를 읽으십시다. 칼빈과 에드워즈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과 나라와 의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날마다 개혁하고, 그 위에서 우리 조국의 교회를 개혁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