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편지

조병수교수의 목회서신 연구(8) - '어긋남'

새벽지기1 2016. 5. 19. 21:31


어긋남은 인간의 본성가운데 하나이다. 앞으로 가려하지만 뒤로 가고, 올라가려고 하지만 내려가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의 일부이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까지도 고통스럽게 고백했을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 인간의 본성 가운데 들어있는 어긋남이란 것은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보다도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이런 악질적인 현상이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 교회에도 발생하였다. 사도 바울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제시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이것들로부터 벗어나 헛된 말에 빠졌다 (6절). 언뜻 생각하기에는 사도 바울이 제시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가. 아니 그랬어야 옳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상 (理想)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이상을 외면하고 도리어 헛된 말에 빠졌다. "헛된 말"이란 발언과 관계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헛되다"는 단어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비신앙적인 생활과 풍습을 나타낸다 (행 14:15; 벧전 1:18). 사도 바울은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복종하지 않는 자와 속이는 자에 병행적으로 묘사하여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양심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딛 1:10).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을 일삼았을 것이다 (딛 3:9).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제시받은 선명한 고급 이상세계를 버리고 신앙을 갖기 전의 세속적인 저급 언어세계로 돌아가버리다니.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추구하고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선호하는 것을 보면, 군자에게서 도적이 나오고 개혁을 부르짖는 무리에게서 허위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어긋남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는 상위현상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어긋남 현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에 어긋남을 빚어내는 사람이 최소한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에게서는 어떤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좌절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어긋남의 현상을 빚어내는 에베소 사람들에게서 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7절) 하였다. 어떤 분야에서 교사가 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가르침은 깨달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려면 율법을 깨달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율법과 관련하여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에 관하여 확신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서 이런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소원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상위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7절). 결국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진리를 헷갈리게 하고 말았다.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하지 말며,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가르치지 말라.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나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불행한 본성가운데 하나인 어긋남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질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옛날처럼 지금도 여전히 교회와 사회에서는 인간의 어긋남이 천연스럽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