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편지

조병수교수의 목회서신 연구(7) - '더욱 근본적으로'

새벽지기1 2016. 5. 18. 15:23


동력이 없으면 동작도 없다. 그래서 동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동력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도록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다. 디모데의 명령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디모데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경계(명령)의 목적은 ... 사랑이거늘". 명령하는 위치에 서 있는 디모데는 무작정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명령의 지위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랑은 권위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서는 권위가 교회를 안전하고 안정되게 만들 수가 없다. 사랑은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사랑을 동력으로 하여 교회가 동작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문제는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권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한가지 질문을 던지려는 듯이 보인다. 사랑이 명령하는 권위의 동력이라면, 사랑의 동력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 사랑에 어떤 출처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랑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기원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이 구절 외에도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자주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 관하여 언급한다 (마음 - 딤후 2:22; 양심 - 딤전 1:19; 3:9; 4:2; 딤후 1:3; 딛 1:15; 믿음 - 30번 이상 나옴). 이 세 단어는 짝을 이루어 사용되
기도 한다 (딛 1:1; 딤전 1:19).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랑에는 동력이 있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외면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외면적인 동기로부터 실천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내면적인 이유에 의하여 실천될 때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상식을 비롯하여 기억력을 넘어 자의식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이다. 목회서신에서는 양심이 대체적으로 옳은 것을 따르려는 비판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을 사용된다.


사랑은 반드시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을 동인으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신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어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 때문이다 (참조. 딤전 3:13; 딤후 1:13; 3: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이와 같이 구원론적인 믿음을 출처로 삼는다. 사랑 그 자체가 동력이지만, 사랑은 또한 동력을 필요로 한다. 참된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에 동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망각증세 때문에 우리는 사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값싼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동력인 마음과 양심과 믿음을 말할 때도 그것들이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정결함을, 양심은 선함을, 믿음은 거짓이 없음을 동력으로 삼는다. 사랑이 내부에서 출원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결함을 근본성으로 삼는 내부에서 출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선함에 바탕을 둔 양심과 거짓 없음에 바탕을 둔 믿음에서 출원해야 하는 것이다. 아는가? 정결함과 선함과 거짓 없음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정의 마지막 자리에서 하
나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장 궁극적인 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살 수 있을 뿐이다. 동력이 없으면 동작도 없다.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