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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改革主義)란 / 신복윤 박사 특강

새벽지기1 2016. 2. 23. 15:26

改革主義란/ 신복윤 박사 특강


개혁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오류와 폐단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생활과 개인생활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루터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1.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 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 스틴의 사상은 그보다 몇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5, p. 29).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 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상게서 p. 30).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1) 성경관
개혁주의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Fred H. Klooster)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그 자체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하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을 사용하여 영감으로 회상케하여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성경 저자의 인간성과 개성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과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들을 보여 주었으며, 진리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표현하였다. 그들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하게 나타내면서도 다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가 있으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는 더욱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Inst. I. 7, 8,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이나를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聖靈)의 신학자라 불리우는 칼빈은 이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칼빈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 위엄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 중의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싸늘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Inst. I.7.1, I.7.5, I.8.13 참조). 칼빈은 또한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Inst. I.7.4)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3:16, 17).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 成文啓示)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엡 2:20).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이요 형체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들 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이와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성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하는 로마 교회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주권사상
개혁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하나님 사상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Pressly, Mason W. , Calvinism and Science, Articlein Ev. Repertoire, 1891, p. 662. Quoted from H. Hemey Ma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1975, p. 32, 33)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전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 있어서는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 24).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교리로써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 태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심리,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3) 불가항력적 은혜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이다. 개혁주의의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 항력적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자들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 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6:5, 렘17,9, 시51:5; 롬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말한 영적선(靈的 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1:21, 요10:14, 행 20:28).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칼빈은 이 선택교리에 대하여 다른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하였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하여서도 높였지만,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를 충분히 논하지 않았다(Inst. III. 21~24).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하셨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

(4) 하나님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칼빈의 이관심에 대하여는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Richmond: John Knox Press, 1971를 읽을 것).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귀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있는 상황에 대하여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 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든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만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해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챤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삶에서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5:19), 우리는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 오랜지공, 존 낙스, 존 파임, 올리버 크롬월, 리쳐드 카메론, 스코틀랜드의 언약론자들, 그리고 존 위더스푼(William of Nassau, the Prince of Orange, John Knox, John Pym, Oliver Cromwell, RichardCameron, the Scottish Covenanters and John Witherspoon),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유산이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폭군의 광포도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계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주의적 영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제43권 3집, 1976. P. 11 참조).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 문화적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 등으로 전개된 개혁주의, 여기에 독특한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에는 신사 참배 결의라는 일대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6.25 동란, WCC 운동, 교단의 분열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국에서의 칼빈연구 100년(이상규,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1924년 칼빈이 처음 소개된 이래 1984년까지 60년동안 칼빈의 저서 번역, 칼빈에 관한 저술, 논문 등을 모두 합쳐 240편밖에 나오지 않은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스스로의 노력도 부족했거니와 외적 여건에도 상당한 지배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강요가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신복윤 박사(전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