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스크랩]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 / 박영돈 교수

새벽지기1 2016. 1. 23. 07:44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


 

성령 충만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사는 것을 뜻하며, 설교자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정황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산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체질화되어야 한다. 많은 설교자가 안고 있는 빈곤한 영성의 문제는 설교할 때만 성령 충만을 구하며 강단위에서만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체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진정한 영성은 강단 위가 아니라 그 아래서 밝히 드러난다. 평상시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다가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기도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돌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설교를 위해 성령을 도구화하려고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해 주관되고 사로잡힌바 된 사람인지는 설교단 아래서 확연히 드러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특별한 사역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평범한 영역까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다. 설교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아래서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입증된다. 그러한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순수하게 하나님 자신과 그 임재를 갈망하며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사모하는지가 밝히 드러난다. 이런 이에게 풍성한 말씀과 영감의 세계가 쉽게 열린다. 보통 때 성령의 임재 속에 살지 않는 이들에게 성경은 봉한 책같이 말씀 속에서 하늘의 영역이 열리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과 긴밀하게 교통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는 이의 설교를 통해서도 간혹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다. 이는 설교자가 부적합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청중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설교자와 상관없이 역사하는 말씀자체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설교자의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평상시 성령을 거스르며 제멋대로 살아도 강단 위에서 설교할 때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니 그런 모순된 설교행위가 상습적이 되고 고질화되어 나중에는 그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떤 목사가 거짓되게 사는데도 설교할 때는 항상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한다면 그는 버림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일 것이다. 과거 미국에 지미 스와게티라는 유명한 TV 전도자는 그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는데 그렇게 설교하고는 곧장 창녀에게 달려가곤 했다. 매번 그런 짓을 되풀이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계속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이 들통이 나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어떤 이는 그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받았다는 감동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은 간혹 휘어진 막대기도 사용하여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신다. 문제는 그런 사람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강단 아래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긍휼인 동시에 설교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설교에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만큼 하나님께서 능력 있게 사용하는 종이라고 교인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며 자신마저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와 설교 시에 임하는 성령의 은혜가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의 얼굴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다. 그는 점차 강단위에서 가면 쓴 자신과 참된 자신을 혼동하게 된다. 자기기만에서 자기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짓선지자들이 그토록 자신 있게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 것도 철저한 자기기만이 빚어낸 당당한 자기 확신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지적과 책망이 심히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자신들이 행한 사역과 거기에 수반된 권능으로 자신을 평가해주지 않느냐는 불만 섟인 항의가 그들의 말에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보는 관점은 아주 달랐다.

 

주님은 그들이 무슨 사역을 했으며, 어떤 권능을 행했는가보다 어떤 삶의 열매를 맺었느냐를 더 우선적으로 고려하셨다. 사역자의 진정성은 열매로 판단된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강단위에서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모습보다 강단아래에서 형편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설교자를 판단하실 것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설교단 위에서 뿐 아니라 그 아래서도 지속적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산물이다. 이 열매가 없는 설교자들은 평소에는 성령을 거스르고 살다가 설교할 때만 성령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심각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평상시 그들을 주관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이며 설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세속적인 욕망의 성취이며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이런 설교자들은 설교사역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던 교회성장을 이루어도 만족을 잠깐이고 가시지 않는 내적 공허함에 쫓기며 더 많은 성취를 위해 허덕인다. 육신의 야망은 끝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며, 이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을 쉼이 없게 하며 지치고 탈진하게 만든다. 이들의 심령은 성령과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있기에 성령만이 줄 수 있는 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영적인 공허함에 시달린다. 설교를 은혜롭게 하고도 허탈감을 느끼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영적인 대용물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며 특별히 음란의 죄같이 짜릿하고 자극적인 죄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이것이 세계적인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고도 몰락한 지미 스와게티나, 수많은 청년들이 열광하는 대형교회를 이뤄놓고도 파멸의 늪에 빠진 전 병욱목사가 생생한 견본으로 보여준 부패한 설교자의 비참한 말로이다. 그들의 설교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들의 실족함으로 인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고 주님의 교회와 복음에 더 큰 거침돌이 되었다. 이것이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목사들이 안고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

 

설교단아래서 성령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참된 영성의 부재가 많은 설교자들을 파멸의 벼랑 끝으로 내몰며 강단의 권위를 땅에 실추시킨다. 이런 영성이 빈곤한 데서 오는 문제, 즉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설교자의 모습이 현저히 다르고, 설교와 인격에 심각한 괴리가 있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을 쇠퇴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다. 어떤 이가 한국교회의 설교의 실태를 진단하면서 한국기독교가 “신뢰 잃은 말의 종교”로 전락했다고 지적하였다. 요즘 설교가 교인들에게 잘 먹히지 않는 것은 설교 내용이 별로 들을 것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목사의 말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인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설교에 교인들이 귀를 기울일지 모르나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살아내지 못하는 설교자의 말을 교인들이 듣고 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목사의 감동적인 설교보다 그 설교와는 딴 판인 목사의 인격과 삶이 교인들에게 더 크게 말하는 법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연설을 할 때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청중이 알고 있는 그의 삶과 인격이 더 큰 소리를 내며 듣는 이들의 귀에 윙윙거리기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교인들은 설교자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며 진정한 영적인 만족을 누리고 있는지를 보기 원하다. 복음이 설교자의 심령과 인격과 삶에 구체적으로 체화되어 전인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듣기 원한다.

 

 @기독교보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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