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스크랩] 성령과 설교준비 / 박영돈 교수

새벽지기1 2016. 1. 24. 05:11

성령과 설교준비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는 설교자의 전인격과 삶이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혀 주관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설교는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의 전인격을 통해 흘러나오고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일에 강단위에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설교를 하려면 주중에 강단 밑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 설교는 밖으로 드러나는 빙상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표면 아래는 한 주간 성령과 동행한 삶이 깔려있고 더 깊은 저변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온 오랜 연단의 과정이 잠재해있다. 한 저명한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묻는 사람에게 40년 걸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설교는 성령이 설교자를 인도하고 훈련하는 오랜 과정을 통해 배양된 인격과 영성, 은사와 지혜를 비롯한 모든 자질의 총화가 발휘되는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설교의 요령과 테크닉을 배우려하지 말고 매일 성령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성령이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영적인 자질과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해 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주일설교 준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성령을 온전히 따르는 삶으로 해야 한다. 잭 헤이우드라는 목사는 “탁월한 설교는 못해도 한 주간 성령과 동행하는 이의 설교를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 진실하지 못한 삶, 깨끗하지 못한 심령, 더러워진 양심으로 성령을 자주 거스르고 근심시키는 설교자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설교자의 바르지 못한 삶이 주일 강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령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하신 분이다. 성령을 거스르는 설교자의 죄가 강단까지 따라 올라가 말씀의 빛과 권세를 앗아가며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를 방해한다. 강단 위에서 설교자의 영성이 여지없이 들통 난다. 마치 범죄한 삼손이 힘이 빠지고 사슬에 매인 것처럼 성령의 능력이 떠나고 무력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우선되는 일이 자신 안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단절시키며 성령의 조명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기도와 회개이다. 불신과 죄악으로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영적인 깜깜함과 막막함을 경험하게 된다. 깊은 회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회복하며, 성령의 조명과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준비하는 노력 없이 성급하게 설교 작성으로 뛰어들면 시간만 낭비하고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뿐 아니라 항상 성령의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는 이는 쉽게 성령의 감화를 받는다.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는 물론이고 인문학 서적이나 딱딱한 신학 책을 읽을 때도 영감의 순간이 자주 임하며, 일상의 단조롭고 자질구레한 일과 속에서도 영적인 깨우침을 받는 기회가 그치지 않는다. 이런 영감과 계시의 순간들을 잘 포착해서 활용하기 위해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메모해놓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인간적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노력을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는 육적인 열심으로 배격한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하게 하심만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강단에 올라가면 성령이 전할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마10:19-20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나 이 주님의 말씀은 설교단이 아니라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는 특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복음을 변증할 때 이 말씀대로 성령이 그에게 할 말을 주셨다. 성령께서 그를 충만케 하셔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행4:8-11).

 

설교자가 성령을 의존하다보면 자신의 역할에 소홀할 수 있다. 성령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태도가 자칫 잘못하면 설교자의 열심과 노력을 약화시키고 그의 게으름을 조장할 수 있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설교사역이 전보다 훨씬 수월해지는 대신에 설교의 효력과 열매는 더 풍성하게 나타나기에, 성령의 은혜만을 믿고 더 태만해지기 쉽다. 육신의 힘을 빼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해야 할 일까지 손놓아버리는 것이 탈이다.

 

육적인 설교자의 문제가 과도한 욕망과 열정이라면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바로 게으름이다. 성령의 은혜만을 믿고 설교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에 몰두한 나머지 학적인 것을 경시한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것이 큰 흠이다. 이런 이들은 “영감(inspiration)은 공부와 상관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공부 때문에 온다.”는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가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하리라.

 

지금 우리는 2천년 교회역사에서 무르익은 신학의 풍요로운 열매와 혜택을 만끽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설교자들이 손쉽게 참고할 수 있는 성경해석과 설교를 위한 좋은 주석들과 신학적 자료들이 무궁무진하다. 조금만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설교를 만들 수 있는데도 너무 게을러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허접한 설교로 교인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이들이 적잖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설교했던 스펄젼도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거두지 못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자신의 설교사역을 회고하면서 만일 자신의 사역을 다시 한다면 그는 두 가지를 바꾸겠다고 했다. 첫째는 자신이 했던 것보다 세배는 더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설교하고 너무 적게 공부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더 기도하겠노라고 했다. 그의 뼈아픈 자성에서 나온 고백을 설교자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설교는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기에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성경본문연구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연구에 소홀할 때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이 본문에서 의도하신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본문의 뜻에 멀어질수록 설교에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욕구와 기호에 맞추어 말씀을 조작할 때, 청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것을 말씀에 더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꼭 해야 할 말을 뺄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

 

기발한 예화나 유머를 가미하여 설교의 효과를 돋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성령의 감동을 삭감시키고 대체할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성경강해가 탁월하고 신학적인 치밀함과 영적인 깊이가 있는데다 대중적인 적용성까지 두루 갖춘 불후의 명 설교를 창작하고픈 유혹이 열심 있는 설교자들을 늘 따라 다닌다. 설교준비를 게을리 하는 것 뿐 아니라 열심히 하는 데에도 성령을 거스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그 자체를 거의 우상화하므로 성령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보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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