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탁월함이 치명적인 약점/ 박영돈 교수

새벽지기1 2016. 1. 25. 07:24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게으름과 과잉열심이라는 양쪽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줄타기하는 중용의 묘미를 터득해가야 한다. 설교자가 매번 창조적이고 신선한 내용으로 꽉 차고 빼어난 문장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고품격 설교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설교자마다 설교의 은사와 학적인 소양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수준 높은 설교 원고를 기대할 수 없다.

 

정용섭 목사는 철학과 인문학의 도구들을 활용해 성경을 창의적으로 이해하고 풀어가는 설교를 주문하는데, 그것은 그의 이상일 뿐 설교가 꼭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일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지식의 겉멋부리는 설교를 만들어 낼만한 학식도 없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다. 정신없이 쫓기는 각박한 목회현실 속에서 성경본문이라도 제대로 해석해서 설교한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형편이다. 비록 탁월한 내용의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못할지라도 성령과 매일 동행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영감 받은 말씀을 수수하게 전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설교는 인간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린 오병이어와 같이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설교의 능력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비천한 방편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미련함과 비천함이란 설교의 본질적인 특성을 설교를 지혜롭고 아름답게 꾸미는 노력으로 상쇄해버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떠나갈 수 있다. 뛰어난 재담과 유머 감각으로 사람들을 끄는 것만큼 화려한 언어구사력이나 화술, 또는 지적인 탁월함으로 설교를 치장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려는 것도 성령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성령은 설교의 능력이 말의 유창함이나 언어의 존재론적인 능력이나 지식의 힘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방편을 즐겨 사용하신다.

 

설교자의 약점보다 탁월함이 설교사역에 더 거침돌이 될 수도 있다. 설교의 은사와 언변이 뛰어나고 지적으로 출중한 실력을 갖출수록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처절한 무력함을 망각하기가 쉽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대 의존감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반면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의존하려는 뿌리 깊은 자만심은 더 팽배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의 탁월함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사역에 방해거리가 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죄악 뿐 아니라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온전히 돌아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자신의 뛰어난 지식과 재능을 주님 앞에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nothing)로 만들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무에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무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탁월함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다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이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도구로 다시 부활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은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는 설교자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여, 그를 통해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하신다. 윌리암 스틸(William Still)이 말했듯이, 오직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구주를 전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친 후에 설교자의 탁월함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은밀히 가로채는 마귀적인 교활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 적합한 그리스도적인 ‘수줍음’을 띠게 된다.

 

설교의 위기는 복음 전파자들이 설교를 잘 해서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는 강한 인정욕구에 이끌리거나, 설교의 큰 성과를 거두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데서 부터 기인된다. 이런 욕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청중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서 좋은 반응과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탐하는 욕심이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청중만 의식하며 그들의 관심과 반응을 끄는데 만 민감하게 한다. 여기서부터 설교가 하나님보다 청중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행위로 변질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얻고 그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려는 욕망의 뒷면은 두려움이다. 설교를 못해서 청중의 사랑과 인정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며 그들의 인정 위에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자신의 명성이 금갈까봐 노심초사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명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거기에 목을 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주던 것들을 잃을 때 자신의 존재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붕괴되는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고사하고 조롱감이 될 정도로 자신이 사람들 앞에 망가지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대가로 받게 되는 형벌인 셈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더 사랑함에서부터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강렬한 패션을 가진 성령께 사로잡히면 그의 인정욕구가 지향하는 바가 획기적으로 전환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을 간절히 추구하게 된다. 그의 두려움은 새로운 두려움으로 대체된다. 전에는 청중의 호응과 인정을 얻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전파하지 못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기와 호응을 잃을까봐, 그들의 비위를 상하고 거스르게 할까 두려워하던 데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뜻이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해도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을 갖게 한다.

 

성령은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두렵고 떨림을,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의 낯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갖게 하신다. 이 담대함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덕목이다. 비겁한 자는 사람들의 아첨꾼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기에 급급한 겁약하고 소심한 설교자들이 있는 반면에,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소신껏 할 말 다하는 용감하고 대범한 설교자가 있다. 그러나 이런 용기가 성령에서 나온 담대함이 아니라 육신의 혈기에서 나온 무례함인 경우가 있다. 비겁함과 무례함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두 얼굴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엄성과 예의조차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고 공격적이다. 이런 무례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데서 비롯된 인간멸시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담대함에는 온유함과 겸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깊이 배어있다.

 

설교자는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가운데서만 설교를 잘 할 수 있다. 자유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성령은 설교자를 옥죄고 짓누르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그를 해방하신다.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설교하게 하신다. 설교자의 마음이 균형 잡히고 평안할 때 설레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온유하게 설교하게 된다. 자유의 복음을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모습으로 전해야 한다. 전하는 메시지만큼 전하는 자의 자세와 모습, 인상과 음성이 중요하다.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실제 효력에 있어서 비언어적인 몸짓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경직되고 불안한 모습, 흥분하고 혈기 찬 음성은 자유의 복음과 상충되며 메시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너무 말을 빨리 하거나 지나치게 큰 소리를 지르며 설교하는 것도 삼가는 것이 좋다. 온유하고 차분하게 전하는 것이 부드러운 복음의 성격과 부합하며 온유한 성령의 특성과도 조화가 된다. 부드러운 음성에 성령의 은혜와 힘이 실릴 때 듣는 이들을 감화하며 그들의 강퍅함을 꺾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은 설교의 내용뿐 아니라 설교자의 음성과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전인적으로 흘러나오는 스피릿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운 얼굴이 듣는 이들의 마음 판에 그려지게 하신다.

 

성령은 설교자의 기억력을 새롭게 하며 생각을 윤활하게 해주고 혀를 풀어주어 말의 자유함을 누리게 하신다. 설교를 준비할 때 잘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 놀랍게 풀리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게 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준비된 원고의 내용을 떠나서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자유가 주어질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유하니 말의 실수를 범하기 쉽다. 성령은 설교자의 몸에 새 힘, 부활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피곤한 중에도 설교하고 난 후에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편해지는 은혜, 즉 성령 안의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