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조명과 신학
복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에 대한 증거이며, 성령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조명하여 그 영광을 보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사도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했다(고후4:6). 성경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사의 맥락을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고 구원역사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러 가장 찬란하게 빛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서 구약에 산재해있던 모든 약속과 소망이 마치 흩어진 퍼즐을 맞추듯 서로 절묘하게 조합되고 연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의 결정체를 이루었다. 이 영광을 계시하는 복음의 진리는 혼란스러운 신비적인 개념으로 모호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체계로 전달되었다.
여기에서 복음에서 계시된 영적인 현실을 통찰하는 인식론적인 방편으로서 성경에 충실한 신학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했다고 하자. 만약 그가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영적인 현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는 온갖 신비주의적이고 체험주의적인 혼돈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성령운동에서 만연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령의 임재를 깊이 체험한 사역자가 자신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실체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잘 해명할 수 있는 신학적인 소양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설교자의 자격을 구비한 셈이다. 신학적인 도구를 통해 그의 설교는 성령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좌우에 날 선 검으로 예리하게 갈고 닦이게 된다. 성령의 불과 신학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불붙는 신학, 로이드 존스의 말로, 불붙은 논리(logic on fire)로 승화될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에서 사역했던 설교자들은 오늘날과 같이 신학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해 이런 자질이 부족했음에도 깊은 영성과 경건의 소유자들이었기에 그나마 성령께 쓰임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요즘 설교자들은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깊은 영성도 없고, 엄청난 신학적인 혜택을 누리면서도 공부하기를 게을리 함으로 최소한의 신학적인 자질마저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참된 영성뿐 아니라 신학까지 실종된 것이 우리 강단의 문제이다.
왜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설교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영적으로 보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마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에 펼쳐지는 삼위하나님의 구원행위와 그 존재의 신비에 대한 점진적인 계시를 체계적이면서도 총괄적으로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설교의 기본기가 훈련되어 있지 않다.
신구약성경의 중심주제인 새 언약의 “약속과 성취(Promise and Fulfillment)"를 구속사의 맥락을 따라 잘 간파하여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어떻게 성취되고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현실화 되었는가를 제대로 설파하지 못한다. 그래서 새 언약의 영이신 성령이 부여하는 은혜의 풍성함과 영광, 성령 안에서 삼위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적인 통치가 펼쳐지는 복된 영적인 현실을 밝히고 사람들을 그 복음에서 열리는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지 못한다.
오늘날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에 복음의 골자는 빠지고 온통 신자의 헌신과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인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많은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설교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데 지대하게 공헌한 두 극단, 즉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의 폐단을 낳았다.
삶과 유리된 믿음에 안주하게 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을 조장했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사람들을 새로운 율법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종교개혁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교회에 성령의 조명과 복음에 대한 합리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신학생들 사이에 영파와 학문파, 기도파와 공부파의 양극단으로 나뉘는 경향이 나타난다. 목사들 중에도 신학무용론에 빠진 신령주의자들은 신학적인 바탕 없이 영적인 깨우침과 체험에 의존하여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그런가하면 주관적인 감정이나 경험의 피상성을 경멸하는 주지주의자들은 신학의 상아탑 안에서 지성의 빛과 합리적인 판단의 명료함에 도취되어 성령의 빛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 ‘신학의 실종’과 ‘영성의 빈곤’, 이 두 가지가 모두 한국교회 강단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 마음에 비추는 성령의 조명과, 그 빛 가운데서 성경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현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는 신학적인 통찰이 하나로 아우러질 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신학교육의 문제는 성령 충만과 신학공부가 거의 연결될 수 없을 정도로 이원화된 것이다.
신학교가 머리에 지식은 좀 채워졌으나 성령으로는 충만하지 못한 복음전파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설교자로서의 훈련에 있어 성령 충만과 신학공부가 결합될 때 성령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한 말씀과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힌 복음전파자들이 등장할 것이며, 이런 설교자들의 출현만이 한국교회에 한 가닥 남은 희망이다.
박영돈 목사 @ 기독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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