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기독교 세계관 강의 / 제2강 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롬3:23~24

새벽지기1 2016. 1. 9. 03:47

2  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3:23~24

 

지성사가 이성중심으로 시작하여 합리주의에서 다원주의까지 왔다. 기독교는 세계,역사,인간,삶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기독교 진리의 정당성은 초월과 자연을 모두 설명하는데 있다.

초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다고도 증명할 수도 없다.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종교개혁자는 우리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구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초월도, 자연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역이다.

19:1에서 일반계시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자연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어 있지만 죄인인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창조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해를 설명하려면 '저게 해야'라고 설명한다. 장님이 눈을 떠야 볼 수 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못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성취, 공헌은 초월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큰 신학적 주제를 갖고 만든 영화이다.

폭풍으로 배가 뒤집어져 있는데 선원은 가만히 있으면 구조대가 온다고 했다.

(사실 구조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신부가

배의 거꾸로(배의 간판으로 가려면 물 밑으로 가야 함) 들어가 탈출하는 이야기 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허무주의만 남는다.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관은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셨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목표,가치관,방향들이 옳게 자리를 잡는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것이다. 구원은 창조 질서의 회복을 말한다.

초월계만이 아니다 초월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구원이 너무 내세 지향적이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지금 여기서 실천하고 누려야 하는 책임과 특권이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은 박해를 통해 소개되었기에 신앙에 대한 '비장'이 있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세대에서는 예수 믿는 것을 흐지부지하게 만들고 신앙을

개인적 영역에서만 믿게 하였다. (: 잠잘 때 잠자리에게 기도하라)

 

자연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이것이 일반 은총이다.

초월은 특별 은총이다. 이렇게 자연과 초월이 분리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종교 개혁자들은 설명했다. 구원을 얻고 나서는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게 된다. 한국교회의 실수는 복음주의적인 것,(복음주의운동:구원-회심에 중심을

둔 운동이다)을 많이 강조하는데 있다. 초월을 너무 강조한다. 초월이 자연을 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시험을 볼 때 기도를 해서 잘하는 경우와 공부를 해서 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기도해서 나온 결과는 신앙적이고 공부를 잘해서 나온 결과는 세상적이고 과학적이다고

생각한다. 성속의 분리 개념이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한다.

 

성속을 이러한 영역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죄의 문제이다.

구원받은 이후에 자연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의 공의로움에 이해와 순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공부를 잘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신앙이다.

22:36~ 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의 중심되는 뜻'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와야 한다. 초월의 경험을 가지지만 자연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3:34~에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즉 초월에 한정되어서는 안되며(옛날 사고방식) 그러나 이것이 이웃사랑(서로간의 사랑)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성속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초월이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을, 즉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가 믿지 않는 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는 굉장히 원색적이다. 빛이 아니라 화염방사기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로 자기의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향기를 발해야 한다. 요일4:20~ 초월을 경험하면 자연에서 신자다움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 현실(자연)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줄서기(질서)를 잘한다.

신앙이 자연계에 있다. 기독교의 특징은 초월에 있지 않고 계시에 있다.

우리의 기도는 주문과 다르다. 누가 왜 열어주는지 모른다. (열려라 참깨..)

기도는 따지는 것이 있고 기도의 대상과 내용이 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구원받은 자는 영적인 각성을 통해 인간 본연의 지위를 가지면서 상식과 교양이 생긴다. 세상에서 우리는 제사장으로 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자됨으로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며 역사하신다.

 

상층부로 하층부를 압도하여 항복시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지 그 이유,의도,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은 모든 과학자가 안다. 원시인의 두개골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8년 전에 공포되었다. 대안이 없기에 그냥 우기고 있다. 과학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했다. 과학과의 싸움이 일종의 신앙과의 싸움임을 알아야 한다. 논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무기는 구원받은 자의 참다운 영광된 모습이다. 허무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인류가 기독교에는 답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세계관과 자연을 담아내는 기독교 진리의 큰 틀을 가지지 못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을

광신자, 맹신자로 불리운다.

 

자유주의는 하층부의 자연주의를 수용하고-과학으로 설명되는 곳으로 인정

상층부만 국한. 자연과 역사와 단절된 새로운 기독교를 창조하려고 했다.

상층부는 상징과 은유로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는 개인적인 신념, 종교적인 사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증거해야 한다.

초월을 붙잡고 있으면 자연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4:4~7)

초월적 내용으로 모든 것을 알았으니, 자연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알았으니 이제는 세상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살고 자연에서 이유와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삶을 살지 말자라는 이야기이다. , 돈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의 가치이다-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초월로 인하여 확인된 세계관으로 진실함, 의로움, 거룩함, 성실, 정직으로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전체 틀을 보아야 한다. - 하나님의 창조주되심, 구원자되심, 심판자이심인 것 (4:8)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틀에서 물어야 한다.-방향과 판단이 선다.

초월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면 노력하자가 아니라 기도하자라고 한다.

성실이 살아야 한다.-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6:33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삶의 현장이 세상 동료를 만나는 자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실, 공의로움, 희생 등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이 세상에서 이기게 되어 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선교지며, 일터며 싸움터며 하나님이 영광이 기적으로

결실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