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기독교신앙의 정체성 : 예수

새벽지기1 2016. 1. 8. 02:05

박영선 목사 특강1>

기독교신앙의 정체성 : 예수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 원고는 2011년 5월 3일,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행한 합신 30주년 기념대회 특강을 녹취해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정리한 글이다. 기독교개혁신보사>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 뭐냐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표어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어떤 교리나 감동이나 헌신보다 앞서는 '예수' 그 인격에 있다. 이것은 오늘 강의하면서 확인해보겠지만 생각과 이해를 좀 더 깊이 있게 하고 넓히는데 도움이 되고 각자의 신앙을 정리시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고 지혜고 구원이시다. 기독교 신앙은 진리, 생명이라는 개념, 이해에 있지 않고 예수 자신이 길이고 진리이시다.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을 것이냐, 예수 밖에 있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생명의 문제고 진리의 문제인 것이 사실이지만 생명은 예수가 만드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는 개념적이지 않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예수를 아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각을 매우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1. 성화에 대한 이해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뭐냐 하면

1차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 '예수를 닮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싱클레어 퍼거슨은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교리를 창조해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닮는다는 것을 각 교파들이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한번 비교하려고 한다. 다만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혁신앙의 강점이 무엇이냐, 개혁신앙의 자랑이 무엇이냐를 비교 속에서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다.

 

1) 루터교


예수 믿는 문제, 예수 닮는 문제에 대하여 루터교는 성화를 칭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루터교가 칭의와 성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묶어서 생각하려고 하는 점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은혜에 속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인간의 조건으로 옮겨질까 봐 매우 애쓴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말 속에 칭의와 성화가 함께 있다는 말이다.
"성화의 실패가 칭의의 실패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여기에 강하게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루터교이다. 이 강조는 사실 우리에게 늘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기록하고 있어야 한다.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앙인의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목사답지 않다는, 윤리적 도덕적 능력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 만큼 넉넉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매주 쥐어짜야 하고, 수십 년 간 짜서 너덜너덜해졌는데 하나님이 거기서 열매를 맺으신다는 사실에 놀란다. 우리는 은혜를 만들지도, 생명을 키우지도 못한다. 하나님만이 예수 안에서 하신다.
그 사실을 우리가 성화에서 성도들을 보면서 보고, 우리 자신에게서 본다. 성화를 실패하면 구원이 무효화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도 우리가 강조하는 성화에서의 문제다. 성화란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가를 기억하는, 내 삶을 은혜 속에서 승리하며 은혜 속에서 인내하라 가르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가르치는 강점 이상으로 한가지 약점이 있다. 모호하다. 이 '모호하다'는 표현은 감히 루터교 교리를 폄하하거나 비평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어느 교리나 그렇듯이 인간의 이해는 어느 부분을 강조하느냐의 문제이다. 동과 서를 붙들어 맬 수 있는 인간의 이해는 없다. 하나님만 동과 서를 붙들어 매신다. 정의와 평화를 입맞추게 하신다.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려면 죽여야 하고 평화를 논하려면 말을 안 해야 한다. 우리는 둘을 묶을 수 없는 한계를 기억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신다.
어느 교단의 교리도 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우길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완벽하고 유일한 교리는 없다. 루터교는 '성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모호하다는 약점이 있다.

 

2) 감리교


감리교인(웨슬레이안)들은 성화란,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훈련해야 된다고 믿는다. 웨슬레이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웨슬레이안'이라고도 하고 저들이 자기 훈련에 집중하기 때문에 방법론자들이다, 즉 'Methodist'라고도 한다.
저들은 기도하고, 연구하며, 훈련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을 지고 나가는 대신에 책임과 의지의 한계를 만났을 때는 답이 없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었나, 하루에 기도를 몇 시간 하는가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잣대여서는 안 된다. 언제나 책임과 그 성취는 예수를 제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것보다는 신비한 은혜이다. 이 신비한 은혜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곧 가볍게 반응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뭐란 말이냐, 은혜를 강조하면 책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는데 그것이 논리성의 문제이기 이전에 죄성을 만든다.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을 면하고 열심히 훈련하는 것을 면하려는 본성이 만들어내는 질문이며 나쁜 생각이다.
은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이의 없이 동의해야 한다. 책임을 반감시키고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에 개혁주의에서 따져보자.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보강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레이안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너희는 예정론도 거부하지" "너희는 책임 위주지" "너희는 자랑을 일삼지"라고 하는 것은 병신같은 반응이다.
예수 열심히 믿고 신앙생활을 헌신해서 하는 자들에게 가서 "너 키 작지"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례요, 무지인 것이다. 그들이 우리만큼 신앙을 잘 정리하지 못 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빗겨간 것에 중심을 두고 있을 수 있으나 그것 갖고 잘 하는데 "넌 삽 가지고 농사짓지, 난 트랙터 있어." 삽 갖고 있는 동네는 제대로 곡식이 자라는데 트랙터 있는 동네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면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을 확보하지 말자.
웨슬레이안 비평해서 개혁주의를 증거 하지말고 삽 갖고 백일 할 것을 트랙터로 한 시간 밀어서 보여라. 개혁주의 신앙이 뭔지 보여라. 우리의 적은 웨슬레이안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죄'다.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3) 오순절


오순절 교회에서는 성화란 무엇이냐 하면 성령께서 제2의 복을 내리사 성령 충만케 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령 충만해지면 정말 사람이 변한다. 놀랍게 변한다. 감동이 무시무시하게 온다. 우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잠깐 돌아보자. 한국 교회에 오순절 교회가 등장하고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며, 그 기쁨을 증거하며 많은 믿음의 신도들을 확보하게 되자 장로교가 시험을 받았다. 순교하며 역사를 지켜온 개신교, 장로교, '장자 교단'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백만이 모인단 말이냐? 그래서 이단 정죄를 거론했다.
그러나 지금, 다 따라하고 있다. 왜 따라하게 되었나? 실제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데 어떡할 것인가? 현실 속에서 베드로가 고린도 지방에서 본 것을 보고 있다. "하나님 이 더러운 것들은 먹을 수 없습니다." "내가 정결하다고 하는데 왜 네가 반대냐?" "성령께서 임하시는데 내가 물세례 주는 걸 어찌 금하리오?" 세례 주고 왔다가 욕 먹는다.
"넌 정신이 나갔구나,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줬단 말이냐?" "난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야. 하나님이 불러서 간 거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겠느냐?" 오순절 운동은 분명히 우리 개신교단 안에 엄연한 한 교파로 자리를 잡았다. 현실이 그렇다.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로이드 존스는 강경파고 존 스토트는 온건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 운동'에 대하여 두 사람은 극단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70년대, 신학교를 다니던 때, 70년대에 존 스토트의 "Baptim and Fullness"라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쓴 책에서 존 스토트는 분명하게 완고한 입장을 표명했다. '중지론'이라는 것이다.
'성령 세례의 중지론이라는 것은 초대교회에만 허락됐던 특별한 은사다.' 이것이 '중지론'이다. 우리가 '중지론'을 배우고 컸다. 존 스토트는 온건하면서도 개방된, WCC 운동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개방적인 신앙인이지만 '중지론자'이다.
로이드 존스는 WCC는 물론 죄고, 이 순수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더 분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분리주의적 강경파'이다. 그가 성령 세례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오순절 교파 교인들이여, 이젠 서로 서로 회개하자. 니들은 무식하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는 차갑지 않느냐."

어떤 한 사람을 마음에 들어하거나 지지할 때, 그 사람이 처음부터 다 강경파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온건파고, 한 사람은 빨갛고, 노랗고, 그렇지 않다. 섞여 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보고 신앙생활을 해보면, 우리가 '옳은 것은 하나다'라고 일괄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 하나 딱 만들어서 주는 사람이 없다. 교리나, 신학이나, 기적이나, 인생이나, 전통이나 무엇으로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보자기 하나에 싸서 넘겨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무한하신, 생각 못할 지혜에 관하여 우리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훌륭하신 목사님도 어디서는 빨간색이고 어디서는 노란색이고 어디서는 허당일 수 있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인간이 가지는 인격과 이해와 실존 속에서도 한 교리를 다 담아내고 살지를 못 한다. 한 교단의 교리가 한 인생보다 크고 그 교리보다 하나님이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그렇다.

 

4) 신비주의


신비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나스 밀란이 있다. 이 신비주의란 뭐냐 하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해야 함을 강조하는 주의를 말한다. 이게 무슨 약점이 있냐 하면, 신비주의는 너무 내적인 교제에 집중을 하다가 현실로부터 자꾸 도망을 간다. 일단 표정이 너무 그럴 듯 해진다. "쯧쯧쯧.. 심령이 그것 밖에 안 된다니..." 이런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생긴다. 천상의 것을 생각하느라고 대화를 하는데 마주보지 않는다.
이것은 위험한 증세다. 현실을 살아야 된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예수를 따라 신앙인으로 울고 불고 지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한숨쉬면서 나에게 주어진, 아무도 대신 갈 수 없는 '내 길'을 가는 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이다.
믿음을 가지면 이 길이 쉬워진다. 모든 것을 해결해서 가는 길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현실이라는 세상의 온갖 위협과 시험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내 교회' '내 가족' '내 나라'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책임 있는 자리를 살아내야 한다.
 
5) 개혁주의


개혁주의의 성화는 로마서 6장을 그 근거로 삼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성화에 관한 표현이냐? 웨슬레이안과 같이 "경건한 생활에 힘써야 한다"라던가, 신비주의자와 같이 "보다 깊은 영적 교제가 있어야 한다"라던가, 이런 것이 성화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앞서 다른 교리들이 했던 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하자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내가 나인지 예수가 난지 모를 깊은 연합에 가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들릴 듯하다.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개혁주의의 성화란, "하나님이 온전히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은혜로 불렀듯이 그 구원의 완성도 예수와 우리를 묶고 승리할 수밖에 없도록 해 놓으셨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앙이 '성화'라는 문제, 즉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전제 위에서 선언하는 것이다.

"헌신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연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안 되는 인간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그 때 걱정하지 마라. 우리의 노력과 최소한의 헌신의 결과가 성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부터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마는,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 현실 속에서 가지는 힘이다. 걱정하지 마라."
외면하고 무책임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웨슬레이안적이고 오순절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방법 가지고 성화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해 보는 것이다. 앞에 것 해보지 않고 개혁주의 신앙으로는 못 들어온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깊은 것인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패했는지를 몰라서 그 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은혜를 구하고 성령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깊은 내적 성찰과 교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도 자빠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이 세 가지이다. 구제할 때도 죄가 따라온다, 기도할 때도 죄는 따라올 수 있다. 금식할 때도 죄는 따라올 수 있다.
개혁주의 신앙이 가진 깊이를 알겠는가. 죄가 뭔가, 인간이 뭔가에 대하여 개혁주의만큼 깊은 교리는 없다. 거기에 개혁신앙의 강점이 있다. 우리는 더 깊은 이해와 더 깊은 은혜의 필요성을 안다고 해서 앞에 있는 노력들을 한심하게 볼 것이 아니라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깊은 이해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되, 결국 그게 자빠질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에 대해 준비하게 만든다.
기도하고 소원해서 보상을 받고 발전하고 완성되는 인간이 아니라 미련을 떨고 무지하고 실패할 때 뿐 아니요 진실을 가지고 헌신을 약속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사심을 버리고 주를 위해 일할 때에도 죄가 따라온다는 사실로 인하여 뒤집어졌을 때 그때 개혁신앙이 이미 그걸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성이 깊어져야 한다. 인간성이 깊어진다는 건 정답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변변치 못하다는 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너그러워지는 것을 요구한다.

어떤 감격, 어떤 성취, 어떤 깨우침도 평생 가지 않는다. 그 깨우침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다. 은혜를 받은 것이 끝까지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은혜가 지속되게 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지속되게 하는 은혜의 필수적인 조건은 끊임없이 은혜를 구해야 한다. "나는 이제 알았다" 이런 말은 초보 때 하는 말이다.
개혁주의 신앙이 갖는 큰 강점이다. '이렇게 하면 된다' 하는 모든 신앙의 어떤 단순하고 분명한 것들로만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의 깊이를 가져야 한다.

 

2. 개혁주의와 성화

 

우리가 갖는 개혁주의 신앙의 깊이가 어디서 나오느냐,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판단, 지혜를 예수라는 성육신으로 최고의 영광 위에 나타나신다. 예수를 위해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로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은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법칙은 비인격적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때 인격은 사라진다. 기독교는 인격성을 가진다. 예수가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다. 하나님은 찾아와 위로하시는 분이다. 기독교신앙의 유일하고 전부인 내용이다.

인격성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어떤 산을 올라가는데 어떤 아낙네가 빠른 발걸음으로 올라가더니 더 바쁜 발걸음으로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져 죽더라.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산에 올라가면 산삼이 하나 있으니 가져다가 다려드려라" 해서 남들이 캐가기 전에 새벽같이 뛰어 올라가서 가지고 뛰어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 넘어져 떨어져 죽었다. 자연 법칙인 것이다. 비정하다. 이 여인이 지금 어떤 형편에 있고, 왜 그랬는지 안 따진다. 미끌어지면 죽는 것이다. 이것이 법칙이다.
기독교는 안 그렇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신다. 생각하시는 분이고 처지를 이해하시는 분이다. 찾아와 동참하시는 분이다. "너 그랬구나. 내가 품어주마!"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유일하고 전부인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차 하면 예수는 없고 믿음, 오만, 진리, 소망 이런 데에 빠진다. 그러면 표정이 두드러지게 변한다.

 

마치는 말

 

30주년을 맞은 개혁교단 동지 여러분!
얼굴 표정 좀 부드럽게 하자. 못 생기면 죄가 아닌데 표정이 바뀌면 죄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에게 묻는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예수가 대답한다. "나를 봤는데 뭘 또 보려 하느냐?" 하나님이 그런 모습일지 빌립은 몰랐던 것이다.
자꾸 우리는 합신 교단이 갖는 정체성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100만 성도, 세계를 품에 안는 교단 합신." 이런 것이 정체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번쩍번쩍하는 데서 일하시지 않는다.

 

 

기독교개혁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