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스크랩] 특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설명/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5. 11. 3. 17:05

특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설명

강사: 박 영 선 목사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 우리 함께 할 내용은 현대화와 현대성에 관한 것입니다. 합리주의로 대표하는 문예부흥이후에 지성의 흐름 혹은 사상의 흐름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공격받고 세상이 인본주의로 득세를 하고 했던 문제들을 생각했다면 그 문제를 사회학적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현대화에 대한 오늘의 공부입니다. 현대화라는 것은 사회가 제조와 상업이라는 목적을 중심으로 도시주면에 재편성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전에 사회구조는 농경사회가 기본적인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계문명이 발달하면서 산업이 놀랄 만큼 발전하게 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집니다. 옛날에는 도시화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이유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필수품들을 생산하는 것들이 농사가 목축이 기본단위였기 때문에 많은 면적을 필요로 해서 띄엄띄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이 발달을 하고 기계가 발전하니까 제조업과 생산이 굉장히 대량화되고 그걸로 인한 경제규모가 커지고 상업화를 위하여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많은 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더 큰 경제활동을 하는 일들이 자연스러운 추세가 되어 도시화가 가속되게 됩니다.

 

이 도시화의 과정을 말하자면 현대화라 합니다. 이 사회가 옛날 농경사회로서 가지고 있던 구조, 체계에서부터 제조와 생산이 집중되고 대량화되기 때문에 도시화되는 이런 과정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과정 속에서의 내용들을 현대성이라고 합니다. 대화 되면서 생기는 특성들을 현대성이라고 합니다. 왜 도시집중현상이 일어났느냐! 산업혁명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산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하여 예전에 비교할 수 없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사람들은 옛날 같은 구조로 사회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옛날 같은 구조라는 것은 전통과 권위가 있는 질서와 환경 속에서 살다가 이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이유로 모이는 도시생활을 하기 됩니다. 도시생활 이전에 옛날에 농촌, 농촌이라고 애기하기까지 뭐하면 도시화까지는 아닌 그런 삶에 형태를 보면 거기는 대대로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이어 살았기 때문 한 집안에만 가계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주거지역 전체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대대로 관계를 유지하고 살던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최진사댁 셋째 딸 그러면 다 아는 겁니다. 모두가 다 아는 사회가 되었다가 도시화가 되면서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사회로 급격히 변하게 되는 겁니다. 삶의 방식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삶의 배경이 변하는데 그 배경이라는 것은 집안과 집안이 알고 있던 사회로부터 아무도 모르는 사회로 변화되는 것이 현대화고, 그 변화로 인하여 생기는 특성들을 현대성이라고 하는데 이 둘의 차이는 예전에 전통적인 주거형태와 지금 도시화된 현재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우리 현대인의 삶에 주거형태나 삶의 환경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 변화가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왜 이 꼴로 살고 있는지 우리에 삶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무엇인지를 느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현대화라는 도시 집중현상이 어떤 중요한 특징을 만들어냈느냐 하면 인간들을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놓습니다. 공적인 사회에서의 관계와 사적인 개인의 삶의 관계로 나누어 놨습니다.

 

공적인 삶의 영역이란 순전히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합친 영역입니다. 여기에서 공통된 목적은 순전히 상업성입니다. 현대사회라는 것은 사람들의 공적관계는 쉽게 회사입니다. 회사란 기업의 이윤을 위하여 모인 각자의 기능들만으로 묶어놓은 관계가 공적인 영역인 것입니다. 거기서는 개인적인 주장들은 꺼내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사에 출근하는데 내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데리고 가야되겠다. 이런 것들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개인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삶의 영역과 공적인 삶의 영역은 전혀 다릅니다. 이 다른 것이 이제 문제가 됩니다. 공적세계의 특징은 이 세계 안에서 개인이 지니는 중요성은 그들의 됨됨이나 그들이 견제하고 있는 가치, 신념. 신앙이 아니라 개인이 행하는 일에만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 사람이 진실하냐? 고매하냐? 이런 것은 아무 필요 없고 그 사람이 이 집단에 필요에 응하는가만 있습니다. 이 공적인 세계에서 개인적인 세계는 사실상 장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의 성공은 그 사람이 얼마나 비인격적이 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업이나 기업의 효율성은 그런 적응능력을 요구합니다. 뭐가 없어졌는가를 보시면 예전에 가졌던 덕목들 인격. 진실. 정직 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기억. 순전히 상업성과 효율성에 필요한 기능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이루어 놓은 현대성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이미 그렇게 구성된 사회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성 속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우선 현대화가 이루어 놓은 사회의 특징 첫째가 다원주의입니다. 왜 다원주의가 생기게 되었느냐하면 도시는 도시자체적인 심리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도시는 다양한 세계관과 문화적이고 종적적인 차이점과 개인가치를 한곳으로 모아놓았습니다. 우리는 순전히 상업적 이해관계로 인해서 도시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신념이나 취미 때문에 모인 곳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서로 싸우고 경합하는 견해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의식을 제거하는 다원주의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불교신자든 기독교신자든 무신자든 아무 상관이 없다. “너 차만 많이 팔아라!” 이것만 남은 겁니다. 그 사회에 우리가 삶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원화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로 우리가 뭉쳐있지 않은 겁니다. 여기는 물론 교회나 절도 아닙니다.

 

우리 현대화된 사회 속에서의 모든 공적인 영역은 이해관계 때문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이해관계란 개인의 관계지만 공통된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모여 있는 겁니다. 이런 다원주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거주민의 각자의 가치를 축소시켜서 최소한의 공통분모만 가지게 했습니다. 최소한의 공통분모 기업의 목적은 기업의 이윤을 내는 것 그 이윤을 내는데 쓸모 있는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이 공적인 영역에서 꺼내 놓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회의하다말고 예수 믿읍시다. 그러면 죽는 겁니다. 그 때 순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다원주의 사회입니다. 도시생활에는 대중적인 윤리와 공전할 수 있는 만드는 우호성이 필요합니다. 대중적인 윤리와 공전할 수 있는 우호성이란 우리는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는 싸워서는 안 됩니다. 특히 종교, 정치적인 견해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은 기업에서는 중요한 싸움꺼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잡담으로는 할 수 있고 토론으로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공적영역의 공적인 내용이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우호성을 가지려면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판단을 유보하거나 제거해야만 합니다. 모든 종류의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에치켓에 의해서 전부 유보되어야만 합니다. 정치문제도 너무 강하게 누가 안 되면 안 돼! 이렇게 밀고 나오면 더 이상 회사원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제거되자 우리들이 모든 삶의 영역 속에는 기술시대에 구조에서 필요로 하는 효율성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현대성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시면 이 부분 대하여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좋은 글을 쓴 사람이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입니다. 어린왕자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왕자가 하는 말이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어른들은 내 친구가 사는 집의 창문에 좋은 꽃을 놨다 그러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2억짜리 집에 산다. 그러면 알아듣는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화폐로 환산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그러면 저 사람 벤츠 타고 다녀, 그러면 금방 알아듣는다고요. 아 부자구나! 근데 저 사람의 취미가 뭐고 어떤 노래를 좋아하고 그러면 ! 요점만 말해그런다고요 그러면 부자란 말이야. 얼마큼. 벤츠 600타고 다녀 그러면 금방 알아듣는다고요 이와 같은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현대인으로서 익숙한 가를 알 수 있겠죠. 제 아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를 데리고 오면 저희 엄마가 이걸 꼭 묻곤 했습니다. 걔네 집 잘 사니?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아들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엄마 살만큼 살아! ! 걔 공부 잘하니? 물으면 아들은 엄마 할 만큼 해! 우리애가 어린 왕자였다 하는 생각이 요사이 와서 듭니다.

 

우린 그것을 악의를 가지거나 무슨 차별을 하지고하는 질문이 아니지만 그렇게 안하면 우리는 이해를 못한다니까요. 현대화된 세계 속에 이미 우리의 사고들이 굳어져 있고 거기에 아주 물들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 구분이 생겨난 것이 두 번째 현재성의 특징이 됩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씀 드린 것같이 현대성의 공적영역은 다원주의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애기들을 꺼내놓을 수 없고 각자의 절대를 각자 갖기로 한 것을 양해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신념이라든가 신앙이라든가 절대적인 주장 같은 것들은 다 개인의 영역에서만 피력하도록 되어있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피력할 수 없는 것이 되어서 문제는 우리들이 가지는 신념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 진실 하다. 정직하다. 겸손하다. 하는 것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것같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요즘 허리우드 영화를 보시면 이런 문제들이 얼마든지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분명히 영화 속에 이런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습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이런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습니다.

 

요즘에는 어떻게 변했느냐하면 악당이 꼭 실패하게 되어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악당이 나쁜 짓하고 도망가서 잡히는 장면 없이 끝나는 것으로 되더니 드디어 어느 날 부터인가 악당이 악당 짓을 해서 아무렇지도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경찰서를 털어라, 제목부터 말이 안 되는 제목입니다. 전문털이범이 금고 안에 고이 간직되어있는 큰 다이아몬드 훔쳤다가 잡히는데 잡힐 때에 공사 중인 건물의 환기통에 그 다이아몬을 붙여놓고 잡혀서 잠간 옥살이 하고 나와서 찾아갈 셈인데 감옥에서 나와 보니 경찰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짜 경찰 행세를 하고 들어가서 그 보석을 다시 찾아내기 위하여 쇼를 하다가 진짜 경찰보다 잘하는 경찰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도둑질하고 살았기 때문에 너무나 그 세계를 잘 아는 겁니다. 나중에 들키게 된 입장에서 맥시코로 도망가는데. 국경선 라인을 벗어나는데 서 있어서 동료 아닌 동료 경찰이 잡으려 하다가 국경밖에 서 있어서 그냥 잡지 않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이다

 

이것이 현대성입니다. 이제 죄다 정의다 하는 것도 모호해 진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준과 사태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하는 상대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은 뭘 낳느냐 하면 가장 중요한 부작용으로 현대성이 사람들을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로부터 단절시킴으로 그들을 거대한 비인격적 현대문화의 중심지 안으로 끌어들였다.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라는 건 예전에 살던 전통과 권위가 존재했던 주거환경을 말합니다. 그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법이야! 라든가 옛 말에 이르기를! 이라는 것이 통했던 사회였습니다. 왜 통했느냐 하면 옆집 앞집 뒷집 모두가 질서가 있던 주거 환경 속에 살았기 때문에 한 번 악 소리쳐봐야 어떻게 뒤집을 수가 없어서 좋든 싫든 질서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질서는 전통과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화되자 우리는 아래고 위고 다 없죠.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끼리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 있는,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불과하니까 개인적인 주장이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혹은 신앙이 공적인 검증과 동의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어떤 신념들 혹은 신앙들에 대하여 우리가 훨씬 외로움을 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맞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자시라면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갖는 신앙에 공적으로 확인 될 수 없단 말인가 이것이 한국교회 뿐만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사는 모든 신자들의 의문점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현대화된 사회화된 특성이 이런 일들을 검증하고 또는 요구하는 것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탓입니다. 현대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더 큰 요구를 하게 됩니다. 더 큰 초월로 이 모든 자연을 깨고 들어와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것과 내가 그 백성된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엘리야가 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 현대화가 가지는 속성과 그 속성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기독교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실력을 준비하지 못하고 오직 초월로 자연을 깨기를 바라는 극단적인 신앙요청을 하게 될 때 우리는 더욱 현대사회 속에서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은 이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미친놈이 한 100명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는 이것이 공평한 비율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미친놈은 10000명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입니다. 놈이라 그랬다고 너무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좋은 말 할 입장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가지는 현대성은 문화의 중심지로서 의미입니다.

현대사회의 문화의 가치는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상호연결된 거대한 체계, 곧 경제와 정치, 지식생산자인 대학교, 우리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메스미디어를 통해 전달됩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문화중심지입니다. 문화를 생산해 내는 곳입니다. 이 각각의 체계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그 체계의 가치를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정치, 경제, 교육 공중파 메스미디어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합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기준이라는 것을 가지 못한 사회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다수의 의견을 좇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행에 민감해 질 수밖에 없고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그러니까 질서나 기준이나 권위를 생산해 내게 됩니다. 학교라는 곳에서 우리가 공부를 하면 학교를 우리는 절대적인 곳으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가 인본주의적 합리주의로 인하여 기초되고 그렇게 이해한 학문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되고 그것이 교육이나 과학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과학이 가지는 부분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학은 나타난 현상밖에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육은 자기가 아는 것밖에는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가르친다면 하나님에 대한 것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현대사회가 그렇듯 진화론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 계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인간이 만족하는 설명과 체계를 또는 논리를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교육에 들어와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상을 향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자 하는 것이 우리 해답이 아니고 저들이 주장하는 것과 우리가 주장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보여 내야 됩니다. 이런 체계들은 비인격적이며 익명성을 중심으로 합니다. 비인격적이며 익명성을 중심한다는 것은 한 인격을 변화시키고 한 인격으로 증명되는 내용들이 아니고 유행 같은 하나의 풍조로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사람들을 만나면 개인적인 인격이 동원된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사회에서는 만들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확인한다면 한 인간이 변화되고 감동하고 확인된 신념과 영혼에 대한 증언들이 있어야 되는데 현대화된 세상 속에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 살고 죽어갈 짧은 인생 속에서 누가 더 양껏 마음껏 지랄을 떨다 가는가. 외에는 실제로 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밖에 할 것이 없느냐하면 스포츠애기나 드라마애기밖에는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수현 드라마 안보면 애기가 안 되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 이렇게 초월적으로 확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어떻게 인류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 성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흔들고 있는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모든 특징들을 우리는 망라해서 세속성이라 합니다. 이 현대성을 세속성이라 합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절대에 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에 관한 것이 없다는 것은 다만 일회성, 상대성 밖에 없는 것을 가르쳐서 세속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진리에 관한 것 생명에 관한 것 아름다움에 관한 것 참다운 감동에 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애기하려면 당연히 하나님과 신앙에 관해서 애기해야 됩니다. 그런 모든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회사에 들어가서 신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를 교회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하여 근본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를 현대인이라고 부릅니다. 현대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전통과 권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현대인이라면 옛날 사람들은 전 근대인입니다. 근대는 모던이즘, 현대는 포스트모던입니다. 전 근대는 신학과 권위와 절대가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것이 그래서 좋았다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중세의 실패는 뭐였느냐 하면 신앙으로 사람들을 강요했던 시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강요하고 억압하여 신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중세를 통하여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다 제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냐 그렇지는 분명히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풍요 속에서 어떻게 신앙은 세상이 우리에게 갖다놓은 시험과 유혹꺼리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한 가를 답을 해야 합니다.

 

중세가 그것을 힘으로 증명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다양함과 풍요함이라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절대 우위를 설명해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이 기독교 신앙 안에 풍성히 있습니다. 이런 걸 자꾸 놓치고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하면 원색적인 초월의 우위성으로 갑니다. 그렇게 가면 사람을 다 항복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 하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물건사려 상점에 가보시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물건이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값이 맞아야 합니다. 또 파는 주인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정하나로 물건을 팔수는 없다니까요 그러면 복음을 판다고 이해를 하세요. 우리는 떼를 써서 붙잡고 파는 꼴이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장사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호객행위를 하면 한 번은 들어가 보지만 그 다음은 맛이 있어야 갑니다. 또 친절해야 갑니다. 그러나 불친절하더라도 정말 맛이 있으면 갑니다. 그러니까 중세시대에는 날 강도짓을 해서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날 강도라고 다 몰아붙이면 안 되는데... 그러나 그런 특징을 가졌고 지금은 그 때와 비슷하게 합니다. 그것을 강요를 힘으로 하지 않고 진지함이라는 것만으로 하고 우리할 일을 다 했다라고 애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현대성의 특징들은 현대사회 안에서 생겨난 특성이며 요부분이 중요한 정의입니다. 이 현대성, 세속성은 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전망과 가치를 말합니다.

 

절대적인, 또는 초월적인 질서와 근거 없는 가치관, 가치체계, 전망, 이런 것들을 현대성이라고 하고 초월과 절대를 외면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세속성, 세속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 중심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모두 도시화 되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도시화의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옛날에 30년 걸렸던 도시화가 요즘은 10, 앞으로는 5, 3, 우리나라도 충청도 지방에 만드는 행정도시의 프로젝트를 보시면 한 3년이나 길어야 5년이면 몇 10만 명이 들어 사는 도시가 생길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편리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정보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세속적 특징으로 사람들을 소용돌이치게 할 것입니다.

 

이 세속주의가 종교에 미친 영향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세속주의는 개인의 삶에서 신성의 영역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가지는 신념들을 영원한 신앙체계로 가지지 못하고 한 개인의 취향과 신념 같은 것으로 격하시켜서 스스로 우리의 신앙을 모두가 호주머니에 넣거나 금고에 잠가놓고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우린 현대화된 세상 속에서 신자라는 사실을 발휘할 환경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날로 그곳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로서 아니라 존재이전의 모든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부터 원천봉쇄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날 어느 기업치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기업인으로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없습니다.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는 현대인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랜드가 그럼 하나님의 기업이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다른 기업과는 다르지만 기독교기업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라는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창업주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기업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업에 속한 자들이 다 기독교신앙의 이름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기업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윤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내는 것은 가능하며 그래야합니다. 기독교기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랜드의 창업주가 신앙이 좋고 신앙으로 기업을 정직하게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신앙의 공통분모의 특성을 가지고는 한계에 와있습니다. 기업이어야 됩니다. 기업을 하되 신앙을 가지고 하는 것과 신앙을 기업보다 앞세운 공통분모나 특징으로 가지고는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다른 것입니다. 교회를 만드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신성의 내용들을 빼앗아 간 세속주의는 이것을 사적인 영역에 배치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신앙들을 공적인 것이 아니고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하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숨거나 감춰서 개인적으로만 소유하게 만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일 큰 문제는 세속주의가 갖는 반 신앙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기독교교인들은 모두가 그 정체를 알고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내에 기독교신앙을 세속화 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세속주의가 공적인 영역에서 신앙을 제외시키면서 인본주의적 세속성을 가지고 종교를 공격하는데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이건 안 된다 그 대표적으로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속주의, 인본주의를 가지고 종교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럴 때는 우리가 기를 쓰고 대적을 하면서도 신앙 안에 세속주의가 들어와서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거룩하심 명령 앞에 서 있지 않고 세상 즉 현대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내용들을 목표로 삼는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쉽게 다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복이라는 말을 성경이 정의하는 것과 현대사회가 정의하는 것은 다릅니다. 현대사회가 정의하는 복은 물질입니다.

 

오늘 본 딤후 3:1-2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런 특징을 가만히 보시면

더 이상 권위와 전통에 의한 질서가 남아있지 않으며 자기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 개인이기주의에 빠질 것이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모든 목적을 둘 것이라고 경고한 말씀과 일치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느냐하면 딤후3:5절에 있는 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신앙은 가지고 있다는데 그 신앙이 가지는 진정한 능력들 신앙 안에서만 발견되는 영원성 만족성. 감동 인격의 변화 같은 것들은 없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신앙의 증거들, 신앙상의 승리들에 대한 증언들은 전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었더니 병이 나았다. 예수를 믿었더니 부자가 됐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항복시키는 방법으로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하는 일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항복하게 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한 목적은 아닙니다. 기도해서 한국축구가 이긴다. 이런 단계는 이제는 지나와야 합니다. 축구를 이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높고 더 넓고 인생전체를 담아내는 문제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 안 하실까?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나눈 내용들이 어쩌면 새로운 방향과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보이시고 알리시고 그리고 그의 뜻을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약속들, 우리 쪽의 이해로는 믿음들은 있습니다. 세상 앞에 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세상이 약속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고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 믿음을 지키는 자로서 그래서 세상의 삶과 환경과 매 조건과 정황들을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여 그들이 세상을 보고 대처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과 다른 신앙인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자로서 이해하고 수용하고 대처하는 것으로 그 차이를 보이셔야 합니다. 신앙인의 신앙생활의 현장이요 현실입니다. 보이게 이기고 보이게 드러나는 것들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애전체를 거쳐서 그리고 전 인류의 역사에 거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기적의 현장들입니다.

 

모든 신자하나 하나와 그들의 삶에 모든 순간과 그의 인생모두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상황과 존재로서 쓰임 받는다는 그런 이해와 확신이 필요하며 그때의 우리의 순종들이 얼마 큰 값을 하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신자로 살아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앙, 집을 팔아서 세운 교회 속에서 성장한 여러 후배들이 이제 기독교신앙이 가지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담아내는 창조주와 섭리자와 심판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여러분의 생애와 존재로서 드러내는, 하나가 전체를 할 수 없는 각각의 자리에서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을 실 줄로 믿습니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