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스크랩] 특강: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요3:16] 강사: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5. 11. 3. 16:36

[특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강 사: 박 영 선 목 사

[본문]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현대란 영어식의 표기할 때 포스트모던시대입니다. 계몽주의를 모던이즘이라 할 때 계몽주의 후 또는 후기 계몽주의에 해당합니다. 현대화가 무엇이며 현대성이 무엇이며 그래서 어떻게 현대사회가 세속주의로 가게 됐는가를 생각한 것이 지난 시간의 강의내용이었습니다.

 

모든 가치와 보편성을 해체하려는 사고와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 포스트모던이즘의 특징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다원주의시대라고도 합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유일한, 기준과 질서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유는 현대라는 사회가 세속성을 정신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 전망과 가치를 가진 시대가 현대사회의 속성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이 없는 사회에서 즉 그걸 부정하는 사회에서 세계를 다 정리하고 통일시킬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다 파편화 시킨 것입니다. 이런 절대적 기준을 부인한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문예부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이 강의 첫 시간에 생각했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기독교신앙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강요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에 대하여 반발하고 거부를 해서 현대사회는 다른 어떤 종교에 대해서가 아니고 기독교에 대하여 특히 적대적입니다. 다원화 된 세상 속에서는 모든 종교를 인정을 하지요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배후 속에는 기독교신앙의 유일성에 대한 거부가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타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특별히 서구문명이 계몽주의 이래로 가졌던 실패와 좌절로 인해서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죠. 동양정신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부흥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보실 겁니다. 동양정신이라는 것은 관념에 관한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이 없는 신입니다. 불교를 예로 든다면 석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석가가 깨우친 그 도, 그 경지가 말하자면 그 종교의 궁극적인 경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이해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은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이요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에서의 자연, 무위자연(無爲自然)은 개인의 특성을 고집하여 싸움이 생긴다고 보고 근원적인 정신과 경지로 회기 하는 것, 환원되어 거기에 자기가 귀속됨으로서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래서 분쟁도, 시기도, 욕심도, 없는 경지를 애기하는 것이 동양종교요 동양사상입니다. 서양이 개인주의와 합의주의 등을 통하여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강조하여 펼쳤던 그런 사고들로부터 좌절을 맛보고 거기서 실패하여 동양정신 속에서도 답을 찾으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지금 설명 드린 대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내용의 기본적인 시각은 서구문명, 서구문화, 서구사상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현대사회는 절대와 초월을 거부한 시대이며 따라서 현대사회의 문화는 그 근거가 되는 정신이나 사상에서 아무런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다 분야별로 나누어서 그 각 분야에 사회활동이 곧 문화고 사상과 정신이 근거가 되어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을 그 내용이나 근거로 하여 활동이나 분야를 통일시킬 것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는 그 공적인 영역에서 정신적 대화를 나눌 토대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활동과 기능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사회에서는 바보가 제일 나쁜 놈입니다. 똑똑한 것이 오히려 낫고 정직한 것도 그렇고 무능하면 현대사회에서는 쓸모가 없는 존재일 뿐 아니라 천하에 역적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공적영역에 정신적 가난함을 스포츠와 드라마로 메꿉니다.

 

우리는 만나서 할 애기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김수현씨 드라마는 대부분 부부싸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멀쩡했던 집안을 싸움 일으켜서 엮어가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보지 말자 했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으면 할 애기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공적인 영역에서 만나서 최소한의 예의와 최소한의 교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박찬호가 이번에도 마이너리그에서 또 졌대요. 이거 큰일 나지 않았어요. 이런 애기나 거침없이 하이킥 빼놓으면 할 애기가 서로 없다니까요 그 이상의 애기를 하면 다원화된 사회에 틀을 깨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제일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아직도 우리만이 옳다, 내 말을 믿어라, 당신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나랑 천국 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제 반기독교운동이 굉장히 거세졌습니다. 그들이 사단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이 시대의 예의와 질서와 교양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현대사회는 그런 것은 서로 이야기 안 해야 합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기독교교인들만이 무분별하게 무모하게 건방지게 독선적으로 해 되니까 못 살겠는 거죠. 우리 기독교교인들이 이 시대에서 기독교교인인 것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사실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국 현대사회의 문화는 활동과 여흥뿐입니다. 원래 문화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지성적 활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정신과 사상이 없는 시대입니다. 오직 실용성과 유용성외에는 따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문화는 활동과 여흥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만한 한 예를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요즘 만들어지는 허리우드 영화들을 중심해서 보시면 스토리가 굉장히 간단합니다. 킹콩 이라는 영화는 어느 이상하게 고립된 성이 하나있는데 빙하기에 어떻게 거기는 모면을 했는지 아직 옛날 고생물들이 살아있어서 어떻게 우연히 찾아들어갔다가 그 거대한 킹콩을 끌고 도시에 나와서 도시에서 난장판을 벌이다가 나중에 죽는 간단한 스토리입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무엇으로 때우느냐 하면 스토리 내에 정신적, 윤리적, 고급한 내용이 들어서 한 개인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하고, 그래서 생겨나는 일들에 대하여 사람 사는 애기가 교훈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결실하는 스토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볼꺼리로 채웁니다.

 

볼꺼리로 채웠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옛날 영화들은 스토리가 생각이 다 났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다음은 이렇게 됐지. 그 다음은 저 사람이 배신을 했지, 그런데 알고도 모른척했지,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상대방이 왜 그때 모른척했어요? 벌써 알았으면서도 그 때 씩 웃었지 이렇게 반추가 됐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느냐하면 그 영화를 다시 보면 아니 이런 장면이 있었나?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케이블TV에서 쥬라기공원3를 해 줬어요. 생전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몇 군데가 기억이 나요 아! 본 영화예요. 그런데 90%가 생각이 안 나요 다 볼꺼리고 간단한 스토리에 붙여졌던 장면들이기 때문에 그 장면들을 유추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시대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자랑은 어디 여행을 갔다 왔다 그래서 잘 놀고 왔다가 있지 그래서 정신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고 어떤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애기는 여러분 들어본 적도 없고 할 만큼의 생각을 요구받으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이런 현대사회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이런 두 가지 부작용을 낳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현대사회에 대해서 우리는 불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실감과 소외감입니다. 이 상실감과 소외감은 인간이 인간성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 대접받고 기능으로만 요구받기 때문에 생기는 인간성에 대한 상실감, 개인존엄성에 대한 상실감입니다. 또한 사회구조 속에 우리가 한 부속품으로 들어있습니다. 익명성으로 존재한다. 라고 전문적인 용어로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고 어느 교회, 어느 회사, 이렇게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삼성그룹에 다닌다, 현대그룹에 다닌다, 이렇게 되어있지 나는 누구다! 라는 것은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해서는 서로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서로 34일 동안 합숙을 한다든가하는 일들은 꿈도 꾸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성에 대한 상실감과 개인의 가치가 사회구조 속에 한몰 되어버린 그래서 가지는 소외감 이런 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사는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식으로 사는 우리의 존재와 인생에 대해서 마음 속 깊은 불만과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비평은 그렇습니다. 인간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냐 그렇지 않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기독교가 가진 인간에 대한 평가나 인간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신앙적 약속들은 비교할 수 없이 존엄하다. 가치 있다, 행복하다. 이겁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앞에서 계몽주의로 출발해서 합리주의로 이 세상이 흘러갔을 때 과학을 근거로 하여 합리성으로 모든 인간과 인생과 세계를 담으려고 했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실패했는가에서 1차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과학과 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과학이 맞냐? 신앙이 맞냐? 는 싸울 꺼리는 아닙니다.

 

과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에 대한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지식들입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인간과 인생과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현대사회라는 것은 삶의 모습이 이렇게 온 것을 이것자체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고 우리가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가치와 그 영광에 걸 맞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히 살 책임이 있고 자기의 책임을 지켜야 할 당연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냐?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현대사회에 대해서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사회의 속성. 즉 세속주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대를 해야 되겠지만 기능화 되고 실용화된 사회라는 환경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신앙이 약속하는 참다운 인간상을 증거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숙제로 남는 것이지 이걸 다 없애고 옛날같이 기도원으로 들어가자든가 따로 신앙촌을 만들자든가 하는 것이 대안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와 재미 속에 살고 있는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인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않고 한 부품으로 그래서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데 우리 현대인들에 가난함과 불만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를 놓고 지금 애기한 인간이 가지는 상실감과 소외감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답은 무엇이며 그것이 나의 존재와 인생 속에 실현가능한 애긴가 하는 대로 돌아와야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요한복음 316절을 택했습니다. 성경이 제일 많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해서 구원을 하여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자명해지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은 기능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사랑을 제일 앞장세워서 기독교신앙의 대표적 특성으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나 굉장한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도 갖다 될 수 없습니다. 제 나이이상 되신 분들은 손주들을 보셨을 텐데 손주같이 예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예쁘냐하면 그 사람이 바보입니다. 그건 예쁘게 생겼거나 예쁜 짓을 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두 분이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손주자랑을 서로 한 겁니다. 손주자랑을 하다 한 분이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기를 주면서 들어봐! 하면서 갖다 준겁니다. 그런데 아무소리도 들리지 안드레요. 그래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그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숨소리 안 들려? 이렇게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사랑한다는데 기독교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두고 애기하십시다.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않고는 그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며 그렇다고 우리가 속고 있거나 자기체면에 걸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멀쩡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 이 자리에 있고 이 고백을 하며 세상에서 괄시를 받거나 바보취급을 받는 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가면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 보통 영생이라고 애기하면 동화책 맨 끝에 왕자와 공부가 결혼을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데요. 행복한 오래 오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생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되어있는데 안다는 표현은 지식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부부관계의 특별한 관계. 부부란 그렇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하나입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성질을 부려서 자기가 아무리 옳아서 성질을 부렸어도 상대방이 가슴 아파하면 자기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이 부부입니다. 부부란 희한합니다. 상대방이 불편하면 본인 불편합니다. 오히려 내가 불편한 것이 낫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 성부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영생을 주신 것은 이 삼위하나님의 연합같이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관계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하는 것이 성경의 영생에 대한 설명이요 구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요한복음 1723절을 보시면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러니까 성부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을 보내어 구원 얻을 우리를 하나가 되어 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 속에는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하나 되심의 관계 속으로 불러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뭘 알게 한다고 말하느냐하면 성부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을 보내어 성부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증거 되도록 이 구원을 베풀었단 말입니다. 이 구원은 성자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성부하나님께 성자하나님께서 귀한 것만큼 귀하다는 뜻이요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각별함에 못지않게 우리를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각별한 연합으로 부르시는 구원이라는 설명입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문제를 누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창조기사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따라 사람을 만들자 할 때, 창조기사에 늘 단수로 등장하시던 하나님이 복수로 등장하시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아마 삼위하나님의 연합과 교제의 각별함이 그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대표적인 것일 것이다. 그래서 부부로 주신 것이다. 인간을 창조할 때 남녀로 허락하사 그 각별한 관계성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이렇게 이해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23절에 있는 이 내용을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 구절을 보시죠. 요한복음 17: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들입니다. 구원은 즉 우리에게 허락한 영생은 삼위하나님의 연합과 긴밀한 관계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공동체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자연 상태라는 개념과는 달리 성경은 우리가 자율적인 개별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연 상태라는 말은 다윈주의를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요 자연선택에 의한 그런 싸움에서 이긴 자, 더 자연에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 개별자로서, 경쟁하고,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여러 속에 태어난 존재라, 여러 과의 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 이렇게 이해한다 말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그 본질이 상호적인 사랑과 교제로 본질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그것은 기능적이기 보다 본질적이며 그런 면에서 이웃 앞에 서는 존재입니다. 이웃 앞에 서는 존재라는 말은 이웃 앞에서 기능하는 존재이지 이웃을 위해서 기능하는 존재이고 함께 하는 자로서 존재하게 되어있지 나를 위하여 주변을 넘어뜨리는 존재로는 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확인해 보면 기독교신앙이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확인할 때마다 성경은 곧 바로 그것이 이웃 앞에서 수평적으로 어떻게 확인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당연히 이웃과도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요일 3:14-15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 되었으면 이웃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죄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못 얻었다고 나누는 기준은 죄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 영생인데 영생을 얻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서 이웃 앞에 자연인 즉 죄인으로 서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옆 사람과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인 죄인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 되자 이웃과 화목 하는 자로 만든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 그리고 동료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상태 바로 이것을 복음이 문제 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우리가 이웃과 싸우는 이유가 뭐냐? 죄 때문입니다. 무조건 사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같이 예수 믿는 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끌어안고 사랑합니다.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상대방의 신앙고백에 얽힌 애기와 개인의 역사를 이해 할 만큼 안 다음에 참 훌륭하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호감이 갑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서 사랑합니다. 그래야지 다짜고짜 나도 예수 믿습니다. 그러면 사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단계와 과정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초월로 한꺼번에 뒤엎으려는 본성적인 종교성, 이것은 기독교성이 아닌 것입니다.

 

소외 또는 상실로서의 죄는 인간 상태를 특징짓고 있습니다. 인간 상태를 특징짓는 소외와 상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상실된 마음속에 있다고 로마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실된 마음대로 내 버려두셨다.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서 예수가 등장하는 이유는 구원 때문이고 구원은 죄 때문이며 죄는 인간답게 하는 것과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두움에 있다든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든가 불법을 행한다든가 이웃을 미워한다든가 이런 것들은 다 소외와 상실에 증상들이며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이며 그것은 다 죄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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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1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구원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의 지금 현실이 죄 때문에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와 이 문제의 해결에 무력하고 무지한 인간의 현실이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과학이든 현대사회의 다양함과 물질세계의 부요함이든 우리는 그것을 온전하게 쓸 수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역사가 증언하는 대로 인간은 외적인 문제를 가지고 싸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내적인 이유로 싸우는데 그것은 언제나 죄 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신앙은 윤리. 도덕적 가치로 설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가 기독교의 복음을 애기할 때는 이것을 이론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언제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1장에 나오는 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가 현대사회 살던 고대사회에 살던 그 사회에 문명정도나 문화의 차이나 민족성이나 환경이나 이런 어떤 것으로도 인간에 인간된 진정한 가치와 또는 한 인생과 혹은 그 사회와 그 시대에 대하여 답을 낼 수 없다하는 것을 우리 기독교교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모든 인류를 보는 안목에서, 역사와 세계를 보는 시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가지는 우리의 답과 이해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 자연계를 만드시고 역사를 인도하고 계시는다는 것을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우리시대와 우리가 몸담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가에 나를 맡기는 신앙적인 이해와 지식이 아주 급한 실정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변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기독교신앙이 그저 옛날과 똑 같은 그 시대와 그 사회와 그 문화와 그 관심이 변화된 속에서도 오직 하나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러나 초월 일변도의 우리기독교 증언, 우리 신앙의 주장들이 초월일변도로 감으로서 자연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연을 담아내고 그 담아낸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요 무책임한 것이요 믿음이 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초월을 사용하시지만 자연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 신자들이 더 깊은 이해와 부요하고 풍성한 신자들에 증언들을 할 줄 알아야할 것입니다.

 

3:9-11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리스도는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만유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온 세계와 온 인류와 온 역사가 그 안에 자리 잡아 종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모든 인류와 역사와 세계를 종합하는 영역이요 질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후 5:15-19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기독교신앙이 뭐냐 할 때에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부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이며 신자의 최우선하는 책임입니다, 우리가 보통 전도라고 말합니다. 이 전도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예수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므로 모두가 화목하게 되는 겁니다. 화목이라는 표현이 너무 관념적이고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비로소 예수 안에서만 모든 사람의 다양함과 다른 개성에도 불구하고 통일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통일과 화목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랑 싸우려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다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품안에 다 품으셔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1:7-1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안에서 통일되는 겁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는 평화와 화목과 용서와 기쁨과 사랑과 감사가 있게 되는 겁니다. 물론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보다 더 크게 세계와 역사를 다 담아서 더 이상 싸움이 있을 수 없는 하나님 통치의 질서와 그 통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기독교교인들이 믿는다. 믿지 않는다. 로 편협한 적대감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서구 역사가 예수 믿고 제국주의 시대 때 많이 한 실수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아프리카나 동양권이 뿌리 깊은 반감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독교의 반감으로 되고 말았는데 그 때 서구 기독교가 이해가 충분치 못해서 일어난 부작용이었습니다.

 

지금 어느 종교나 다른 어떤 문화나 어떤 사상으로도 기독교 같은 답을 제시하는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담아내고 설명하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평화와 감사와 만족을 누구나 다 체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걸 왜 계속하지 못하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린 알고 있고 그 기쁨을 늘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늘 이 싸움을 우리가 이미 얻은 답인데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중간에 기독교적인 답을 제시했을 때와 같이 우리는 기독교신앙으로 비로소 이웃 앞에 섭니다. 그 때 이웃은 복음을 증거 해야 될 전도의 대상으로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그를 고쳐야 되고 바꿔야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나쁘게 말해서 노획물,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지 마시고 나의 다름으로 서야 된다 말입니다. 우리만이 비로소 인류 앞에 참다운 이웃으로 설 수 있는 겁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고 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 우리만이 답을 가진 자로 참다운 이웃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그렀습니다. 이 문제는 구원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심판기준입니다.

 

예수께서 잡히기 전에 제자들을 교훈 하시면서 무슨 비유를 하셨느냐 하면

마태복음 25:35이하에 마지막 심판 때에 이렇게 할 것이다. 그때 양과 염소를 모아 둘로 나눠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 상을 줄 것이요 악하고 게으른 종들에게 심판할 것이다. 라고 길게 비유를 베푸십니다. 그 비유가 뭐냐 하면

 

25:37-45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기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형제는 꼭 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이해관계로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자에게 그리고 도와줘 봐야 그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신자의 신앙실천입니다. 그러니까 잘 해주고 예수 믿으세요. 는 꼭 옳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진 맙시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그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할 때 물론 믿음을 보시고 라는 조건이 나오는 때도 가끔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민망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이것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이걸 하셔야 합니다. 민망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동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경멸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옛날에 저랬지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으면 다 저러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망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거룩함입니다. 이걸 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복음에 진정한 가치를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오시면 예수님의 유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기독교가 사랑을 강조하고 그 강조하는 정도가 얼마나 크냐? 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 아닙니까. 왜 그래야 되는가? 사랑은 고귀한 것이니까. 이런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45절에 있는 바와 같이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아버지가 그걸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이해관계나 논리를 뛰어 넘으셔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관용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법과 질서가 없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 때문에 도둑놈이 들어오면 물건을 싸줘라 이렇게 까지 확대 해석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당연히 붙잡아서 경찰에 넘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욕이나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 인간은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서야 인간성의 회복과 참다운 자리를 찾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 예수의 존재와 필요성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 됩니다.

 

예수. 예수를 외치는 이유는 예수 때문에 이 구원을 얻었고 참다운 하나님의 형상에 인간의 자리를 그 인간성을 회복하고 영광의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유지케 하고 신앙을 실천케 하며 하나님 앞에서와 똑 같이 이웃 앞에서 우리의 자리를 책임지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자리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가지는 계몽주의에서 합리주의로 모든 답을 얻어내려 했을 때에나 다원화 된 지금 현대사회에서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이 고도의 지식과 정보를 가질 지라도 양자(兩者)동일(同一)하게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답이 없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죄가 아닙니다. 과학이 기독교신앙과 어긋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이면 과학이든 물질이든 잘못 사용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죄인 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윤리를 논하든 도덕을 논하든 선을 논하고 의를 논해도 싸움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느냐 하면 하나님 성삼위일체의 연합과 관계의 거룩하심과 충만하심에 대한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즉 영생을 얻어야 이 충만과 이 만족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비로소 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우리 신앙고백의 내용을 얻어낸 감격과 그 고백이 가진 확인들을 드라마틱하게 간증하는 것으로 색깔을 진하게 해서 원색화하여 기독교를 소개하려고 하는 일을 이제 그만하시고, 그것은 늘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을 하곤 하고 그렇게 기독교에 입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보다 깊고 전인격이 동원되고 삶의 전 영역을 담아내는 고급한 지식이나 지혜나 지성이나 인격성을 동원해서 기독교를 소개해야할 책임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논리성 하나로 혹은 나의 종교적 도덕성 하나로 상대방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개가 빨, , , 초 파, . . 인 것 같이 원색적인 기독교 복음을 증거 하는데 대해서도 우리는 그 부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시작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보라쯤 오면 상당한 지성과 지식과 인격이 동원되는 그런 기독교대한 증언도 거기에서 한 몫을 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증언들, 복음에 대한 열정들은 다 치열하기만 합니다. 다 분명하기만 합니다. 그것이 가지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로 세계를 담아내고 인간을 항복시키고 인격을 항복시킬 보다 고급한 여러 요소들을 한국교회가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저의 때는 원색성으로 기독교를 지키고 증거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현대화 되고 다원화되면 그 모두를 항복시킬 보자기가 분명하고 치열하기보다 넓어야 될 책임을 통감하는 것입니다. 그 필요를 통감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미래를 짊어질 청장년여러분! 이 책임이 여러분들의 시대에 크게 교회의 책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줄 아십시오. 이 책임은 동시에 우리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함께 하심과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심을 그 임재를 확인하는 여러분 삶의 신자로서의 기적이기도 할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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