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기독교 세계관 강의 제4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요3:16

새벽지기1 2016. 1. 11. 05:36

4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3:16

 

현대란 포스트모던시대이다. 계몽주의는 모던이다. 후기 계몽주의가 포스트모던이다.

모든 가치의 보편성을 해체하려는 사고가 이 시대의 특징이다. 다원주의시대라고 한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과 질서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현대가 세속성을 그 정신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기준을 부인하는 것은 문예부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중세 기독교가 인간에 대해 억압했다고 생각했기에 현대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하여 거부한다

종교에게는 호의적이다. 동양정신에 (관명의 정신-인격적인 신이 없다) 관심이 많다.

자연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고 통치하는 영역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으로 회귀함으로써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래서 분쟁이나 갈등이 없는 것이다.

 

서구문명,문화,사상의 시각에서 절대와 초월을 거부하고 현대에서는 정신,사상에서 아무런 기초가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정신적인 대화를 할 수 없고 기능과 활동만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바보가 제일 나쁘고 영악한 것이 낫고 무능이 천하의 역적취급을 받는다.

현대인은 이러한 정신적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스포츠와 드라마에 몰두한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원화 사회의 틀을 깨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원화 사회에서 제일 적응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예의, 질서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절대적 기준,원리 등... 기독교가 독선,건방지게 보인다. 현대사회 문화는 활동과 여흥밖에 없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라-스토리가 간단하다. 개인의 고민, 정신적 사상이 없고

볼거리로 채워진다. 보아도 90%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정신적 도움을 얻는 것도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없다.

현대사회의 2가지 부작용은 상실감, 소외감이다. 인간이 기능으로 대접 받고 요구 받는다.

또한 사회 구조 속에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익명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 어느 회사에 다닌다라고 말할 뿐.. ‘나는 누구이다는 없다.....

 

개인의 가치가 사회 구조 속에 함몰된다. 기독교가 가지는 인간에 대한 평가는 존엄하다.

과학과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통치방법에 대한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지식이다.

과학이 인생,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기능화, 실용화된 환경을 거부할 수 없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상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풍요와 재미있는 사회이지만,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있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품으로 이해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했고 영생을 주셨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은 사랑에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한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를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표현은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특별한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관계처럼 우리를 그러한 관계로 부르신다.(구원의 의미)

삼위하나님의 교제와 연합으로(형상의 의미) 우리를 만드셨다. 성경은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율적인 개별적인(다원주의에 반하여)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기능적이기 보다 본질적인 것이다.

이웃 앞에서는 존재이다. 함께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은 수직적인 관계를 확인할 때마다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묻고 있다.

 

요일3:14 영생을 얻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화목 되자마자 이웃과 화목 된다. 우리가 이웃과 싸우는 것은 죄 때문이다.

이웃에 대해 개별적으로, 투쟁적인 관계로 서는 것을 말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본성적인 종교성이다.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바로 초월로 가려고 한다.)

 

4:17 무지,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멀어져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해 무지한 현대사회에서 구원이 시급함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적 가치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들은 역사와 인생, 현실에 대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답과 시각이 있다.

신앙적인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초월일변도의 기독교의 주장은 자연을 담아 낼 수 없다.

초월과 자연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3:9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은 세계,인류를 종합하는 질서이며 영역이다.

 

고후5:15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모든 사람에게 화목으로 부르는 것이다. 1:7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은 화목, 사랑, 감사 등이 생긴다. 하나님의 통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말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협한 적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서구 기독교가 실수한 부분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이웃에게 서야 한다. 전도의 대상으로뿐 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서야 한다.

변화된 모습, 우리만이 가진 답으로, 참다운 이웃으로 그들 앞에 존재해야 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생각하라. 심판의 기준을 말하는 데 그 비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내 형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작은 자' 란 이해 관계없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망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해관계나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 때문에 인간성의 회복(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

이웃 앞에 자비를 책임져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답이 없다.

물질의 풍요, 과학적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죄인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죄인이기에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먼저 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원색적인 간증(또는 복음전도)은 기독교에 입문하는 방법일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다원화된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지식과 지성과 인격이 동원된 고급적인 차원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깊이.높이.넓이로 인생과 세계를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