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기독교 세계관 강의 6강-복음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엡1:7~10

새벽지기1 2016. 1. 13. 03:45

6-복음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1:7~10

 

한국교회의 신앙의 풍토는 복음주의이다.

신학적 뿌리는 종교개혁에 삼고 있고 신앙의 내용은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전통에 그 뿌리를 둔다.

특징은 회심, 체험, 신앙실천의 열정이다. 종종, 특징이 본질을 대신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부작용은 한국교회의 현실과 신앙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큰 부작용은 신학이 실종된 것이다

신학의 실종이란 우리가 믿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소유하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이해가 없다.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치중한다.

한 사람의 신앙을 점검할 때도 신학적이기보다 열심이나 뜨거움 등으로 판단한다.

복음주의 특징은 믿음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으로, 주관주의적으로 되었다.

심미주의적 설교가 대중을 이루게 되었다. 실용주의적인 강조들이 난무하고 문화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나 생각하는 풍토가 없어졌다. 단순하게, 원색적이 되었다. 질서, 조화, 종합적인 것이 홀대 받는다.

예를 들면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신학 때문에 신앙을 잃는다고 한다. 이것이 복음주의가 가지는 본질을 잘 표현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관심사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공부해야 한다.

 

신앙의 총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신학의 3요소는 1.신앙고백적 요소. 2.성찰, 3.미덕의 개발(=영성)이다.

1은 교회가 믿는 내용으로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권위적인 진리로써(사람의 합의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이 빠지게 된다. 믿음과 예배와 선포, 봉사의 수단 등을 잃게 된다.

 

2는 권위적인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는 지적 싸움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성품, 행위, 의지 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역사 전체를 통해 검증하는 반성적 성찰이다.

 

3은 삶의 지혜, 영성으로써 현실에 기독교의 실천을 담아내는 지혜와 실력을 말한다. 회사에 가면 주를 섬기듯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신우회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생각과 실천이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고백과 소원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이 생각을 담아내야 한다. 한국교회가 두고두고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비판이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의미에서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근래까지 '예수 천당'이었다. 순교에 대한 견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순교로써 신앙을 증명할 수 밖에 없는가? 다른 것은 없는 것인가? 요즘은 전도로 신앙을,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다른 종합적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 이다. 아직 어리다는 이야기이다.

 

기독교적인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원색적인, 감동의 싸움이 아니라 넓게, 깊게, 크게, 두텁게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채우고 충만게 하고 부요케하는 싸움이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제는 초월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으로 되어 학문세계에서 신앙고백이 거부되었다.

 

계몽주의로 시작된 합리주의에 함몰되었다. 현대화로 인한 세속성, 다원주의들 때문에 신앙고백이 없어졌다.

신앙고백이 사라지면, 신학적 성찰의 내용과 주제가 없어져서 새로운 주제를 찾게 되었고 동양적 영성에서부터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까지 모든 부분이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되었다.

신앙고백이 사라지자 기독교는 성찰할 내용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삶의 전 영역을 담아낼 신학이나 신앙이 조그만한 주제에 국한되기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노동문제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앙고백의, 신학의 본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리 치료가 넘치게 되었다.

자아에 대한 해결이 주된 것이 되었다. 각자의 신앙고백이 있을 뿐이다. 전체가 동의하고 하나되게 하는 신앙고백이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현대성이 낳은 경영자와 심리학자 유형의 목회자가 되었다.

우리들은 신앙의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야 한다. 현대적 지혜가 신앙고백을 대신하였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성찰에 대한 신학의 의미가 축소되었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실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

고백한 내용으로서의 성찰이 아닌 각자 자기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성찰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는 고백에서 실천에 이르는 과정까지 어떤 모습과 방법, 본질을 드러내는가에 있다.

성찰은 고백에서 무너졌고, 이로써 신학적 성찰이 필요 없는 주제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영성이 없어진 것이다.

선교사수나 선교헌금 등으로 교회를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세계가 되었다.

자기확인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교회의 보이는 것들로 확인한다. 복음주의는 신학성찰의 현학성을 지적하고 즉, 이론화, 관념화, 실천의 부재를 지적했으나

생명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신학을 상실하자 대중성, 상업성, 실용성을 수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언제 할렐루야를 외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소원이나 문제해결에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해방신학적인 복음주의, 은사주의적인 복음주의 등이 되었다. 본질은 사라지고 수식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영혼의 깊은 만족이 없어진다. 신앙고백이 빠지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고 성도는 성도일 수 없다.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견해가 서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더 큰 종이 되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것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은 자기에 대한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을 자기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왜 그렇게 있느냐? 기도하면 된다) 실제로 '할 수 있거든'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통성기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들어시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우성을 쳐서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못하게 하여 자신이 할 수 있도록 믿고 돌아가게 하는 자기최면일 뿐이다.(통성기도를 제발 삼가하자. 통성기도는 절체절명 때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믿는 자의 종교가 되었다. , 은혜 등이 성경적인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게 되었다. 죄란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의 죄의 개념은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나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신학의 실종은 한국교회가 전체가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정체성의 위기임을 알아야 한다.

복음주의는 영적 실천과 신학적 내용을 충실히 지키려는 운동 이였으나 본질을 특징과 혼동해 버렸다.

본질이란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의 내용이란 논리나 체험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누구신가?’와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한 경험은 신학의 전체 내용 중에 한 부분이다.

경험을 통해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소유하는 신학적 성찰을 가져야 한다.

(무식할 때 힘을 가지면 굉장히 위험하다. 무식할 때는 무능해야 한다.) 특징을 본질화할 때 분파주의가 된다.

 

교회란 기독교 신앙을 담은 공동체의 정수이다. 교회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은 예배(경배와 찬양)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활동(, 예배)을 통해 다른 활동이 나아오게 된다.(전도,봉사,....)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함에 따른 만족이 있어야 하나 우리는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지금은 통성기도 할 때(교회의 절체 절명의 시기)라기 보다는 생각하고 지평을 넓힐 때이다.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 초월을 부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 사소한 일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초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5) ‘생각하라, 분별하라, 깨어있으라, 연습하라의 반복으로 성령충만을 묘사하고 있다. 술 취하면 자신의 분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대비(-성령)시킨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감격과 체험에 머무르지 말라. 자신의 삶의 변화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야 한다.

명분과 열정만 있지 실제로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교회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임을 알아야 한다.

(비관적, 비난적인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수준을 올바르게 알자는 의미이다.)

 

한국교회 복음주의의 최대의 특징은 회심이다. 열심은 귀한 것이지만 신학 전체를 보면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삶과 성품의 변화'(하나님의 영광의 회복)라는 구속의 더 큰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내 좌익이든 우익이든 일상의 구속이라는 일관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삶 속에서 스승으로써 예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해서만 예수를 말하지만 삶 속에서의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

죄 관리만 있지 일과 직업, 사회에서의 예수의 초청은 무시되고 외면되고 있다. 말과 삶으로 세상에 우리의 신앙을 제시해야 한다.

세상은 오직 기능만 요구한다. 교회 내에서도 기능만을 요구한다.

, 효율성만을 따진다. 세상처럼.... 신앙을 능력으로 본다. 그러나 신앙은 순종과 인내를 앞세운다.

 

자유주의는 역사 속에 뿌리를 박은(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부활) 기독교를 부인하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구원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 인생, 존재를 바쳐 새사람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구원을 내세적이고 종말적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연합이다.

그리고 또한 이웃과의 화목이고 연합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나라(천국)에 사는 원리와 자세로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통과 슬픔이 남아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특징과 관심사로 서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증언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순교와 피로 지켜 왔고 집 팔아 교회건축 했지만(그런 신앙을 인정하고)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고 영성을 지켜야 한다.

 

 

조에성경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