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구도자의 삶을 통해 도를 깨친 석가는 "삶은 고행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를 진실된 마음으로 깨우치기만 한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삶은 고행이며 동시에 "삶이란 문제의 연속입니다" 삶의 문제는 그 성격에 따라서 우리를 좌절·비탄·슬픔·외로움·죄의식·후회·분노·고민·고뇌 또는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란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모든 과정 속에 있습니다.
삶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만큼 해결하는가에 따라 판가름납니다. 삶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현해 가는 바른 길을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삶은 더욱 더 힘들어지고 피곤해집니다. 삶의 실현의 문제와 관련해서 비유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계절적으로 가을을 내다보는 늦여름에 있습니다.
이미 지난 계절이지만 잠시 봄으로 돌아가 봅시다. 농경 사회에서 봄에 제일 중요한 일은 밭과 논을 경작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기계를 사용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에는 소를 사용해서 밭을 갈았습니다.
소를 이용해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에 멍에를 메웁니다. 그때 소의 목에 메운 멍에가 너무 크거나 작아 잘 맞지 않을 때 목적했던 일을 마치기 어렵습니다. 그때 현명한 방법은 맞는 멍에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실현해 가야 할 자기 몫의 생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몫의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기 위해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생의 실현의 길을 바르게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 실현의 길을 잘못 선택했을 때 삶은 힘들어지고 계속 뒤엉키게 됩니다. 그때 말할 수 없는 피곤이 오게 되고 깊은 무의미성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여기서 생을 실현해 가는데 필요한 통합적 가치나 목적을 멍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맞지 않는 멍에는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의 연속인 삶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가며 살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란 삶의 멍에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보다 삶의 짐을 더욱더 가중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르게 헤아리지 못하고 그것을 활용해 갔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한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해서 주셨는데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과 관련해서 무려 130가지의 지켜야 할 조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다 없어지고 오히려 안식일은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 할대로 피폐한 상태에서 생활의 염려와 불안으로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기보다는 갈등과 좌절 고민을 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은 다 내게 오라"는 초청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짐을 대신 져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와서 먼저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멍에를 바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역시 인생이 고행이며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가 많은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는 길을 알고 계시며 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인도하는 길은 그 시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인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 더 무겁게 하지 않고, 삶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드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배운자들 자신의 노력으로 생의 완성에 도달할려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길을, 젖먹이나 어린아이, 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달파 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로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다 배운 자들이며 스스로 지혜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인데 그 길은 예수님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께 직접 가서 그를 통해 배움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멍에로만 문제가 많은 생을 실현 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인생의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쉼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쉼은 용서·화해·받아 드림·죄사함·불안과 염려의 해방에서 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상적인 쉼의 길은 귀찮은 것이 없어질 때, 미움의 대상이 멀리 떠날 때, 좌절과 고통을 주는 문제가 없어질 때, 경제적으로 부요할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제의 생을 직시하고 받아 드릴려고 하지 않고 피할려고 하며, 책임을 지지않을려고 하며, 종교적 의식이나 계율을 지켜 면제 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삶은 더 어려워지고 영적 성장이나 생의 올바른 실현은 어려워집니다.
그 다음으로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문제의 생을 면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문제가 있는 현실로 오셔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멍에를 끝까지 지고 갈려면 끊임없이 자기 부인을 배워 가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은 예수께서 가셔야 할 메시아의 길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 가느냐 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사탄이 제시한 길은 진정한 메시아의 삶을 실현 해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영웅심, 세속적인 야망은 일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고 진정한 자기 부인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의 생을 실현해 가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자기 부인의 삶을 포기하고 지나치게 자기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는 영적성숙도 없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참된 생의 실현의 길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저와 교분을 가졌던 한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분 내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귀국해서 내외가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아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떳떳이 드러내놓을 수 없는 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에게 그 아이를 숨길려고 하였고 말하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그들 내외에게 그 아이는 걱정의 대상이요 부끄러움과 음울한 삶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공휴일 늦은 오후 저는 그 댁 남편 되는 분으로부터 집으로 와 달라는 부탁 받고 잠시 후 그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기쁨으로 저를 맞이하는 그 분의 안내를 받으며 권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분은 전화로 저를 갑자기 부른 사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공휴일이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이 자리에 앉아서 성경을 읽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어 오면서 여러 가지 구원의 경험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이제부터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되었고, 내일 아침부터 저는 저의 아이의 손목을 잡고 산책을 할려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이 아들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내적으로 희망, 기쁨 감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떤 의미의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정상인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부끄러움과 무거운 짐이 아니고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한 인격적 존재였습니다.
그 분은 그때부터 그 아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 부인의 삶을 배워 가며 그 아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아들과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하나의 귀찮은 문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부터 아버지와 아들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 아이와 함께 늘 고통하시던 예수님은 눈물을 거두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셔야 할 일은 이미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바꾸지 않고, 우리를 바꾸십니다. 상황은 예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힘과, 그 상황에 맞붙는 새로운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그것에 대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현실에게 도피시키시지 않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하여, 이를 사랑으로 정복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므로 보다 성숙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저의 지내 온 날 들을 돌이켜 볼 때 저 역시 많은 생의 문제에 부딪혀 좌절할 때도 있었고, 고민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의 짐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생의 짐을 치워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한 생의 짐들이 그래도 저의 오늘의 현실이 있도록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후회되는 것은 좀더 사랑으로, 믿음으로, 용서로, 생의 짐을 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의 짐이 무겁고 힘든 것은 문제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우리의 용기 없음, 정직하지 못함, 지나친 체면 의식, 미움, 적대감, 불신앙, 책임 회피, 자기중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에서 우리를 자유 하게 해주시고 문제를 직시하게 하고 사랑으로 받아 드리게 합니다. 그때 문제의 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삶의 형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일본에 어떤 젊은 크리스천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해산하는 시간에 남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해산의 고통 가운데서 태어난 아이는 의외로 기형아였습니다. 남편은 그 사실을 숨기고 몇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심하고 부인께 사실을 다 말했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부인은, "여보,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양육하도록 맡기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젊은 부부에게 그 아이는 부끄러운 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그 부부는 다른 어느 부부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곤란한 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든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생을 아름답게 성취시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생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드리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재료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지어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재료로서 우리에게 재능과 능력을 가진 우리 자신을 제공해 주시고, 아름답고 풍성한 세계를 제공해 주시고, 다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동료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재료들을 다루어 가치 있는 인생을 지어내어라"
생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을 지어 가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을 도피할 때 문제는 더욱더 힘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 복잡하게 된 문제의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기 위해 예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에게 가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초청의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개역 개정판)
- 아 멘 -
'좋은 말씀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 윌리엄 퍼킨스 (0) | 2015.12.03 |
---|---|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 (막2:1-12) / 임영수목사 (0) | 2015.12.03 |
갈대는 무엇이며 상함은 무엇인가 / 리차드십스 (0) | 2015.12.03 |
자살과 구원의 상관성 (0) | 2015.12.02 |
[스크랩] 하나님과 인격적 대화에 대한 가르침 (0) | 201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