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의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대답한다.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의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율법이나 공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오직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알고 믿는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가셨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서 오신
우리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이 되신다.(고전 1:30)
다시 말하면 은혜를 통하여 우리 위에서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고 다스리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신다.
여기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며 양심의 공포와 뉘우침도 알지 못한다.
이 기독교적 의에 죄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기 때문이다.(롬 4:15)
그러므로 만일 여기 죄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양심이나 공포나 슬픔도 없다.
그래서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그러나 만일 양심이 공포를 느끼면
이것은 이미 의는 사라졌고 은혜는 눈에서 사라졌고
그리스도는 감추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표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참으로 보이는 곳에는
주님 안에 충만하고 온전한 기쁨이 틀림없이 있으며 마음의 평화가 있다.
거기서 사람의 심령은 이렇게 선포한다.
“비록 내가 율법에 의하면 죄인이며 율법의 의로 심판을 받은 자이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의 의가 되시며 나의 영원한 하늘로부터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루터,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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