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성탄절(3)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8. 7. 05:55

아래도 역시 칼 바르트의 글이오. 20세기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성탄절을 어떻게 묵상하는지 들어보시오.(2010년 12월27일, 월)

 

여관에 방이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에서 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야만 할, 실제로 태어난 아이에게 방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어줄 방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여관은 오늘 우리가 허름하다거나, 또는 조금 나은 호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숙소를 가리켰습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집은 아닙니다. 그 집은 응접실과 식당과 객실이 딸려 있겠지요. 오늘날에는 그런 여관에 큰 지하실도 딸려 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지 사람이 거처하고 휴식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장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거처하기 좋은 곳에 아쉽게도 그 당시에 태어나야 할 아이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손님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분이 높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별하는 여관이라니, 유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완전히 다른 곳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말입니다. 물론 구주는 더 이상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역사에서 한번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는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시며 능력으로 대하십니다. 바로 그분이 구주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 종류의 여관은 어떤 상태인가요? 시청, 카지노, 혹은 대학교, 대성당 같은 것들은 당연히 이런 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젤 시(市)에 있는 많은 개인주택, 호화저택, 음식점과 가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른 시에 있는 연방의회 건물, 또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로마의 바티칸, 워싱턴의 백악관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여관에 구주는 찾아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죠? 이 모든 집들에는 물론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구주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을 찾아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여관에 그를 위한 방이 없을까요? 그곳에는 훨씬 좋은, 훨씬 바쁜, 훨씬 유식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주를 위한 방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오려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주가 바로 그들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구주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몹시 필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여관들이 그분에게 문을 닫아건다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어서 모든 것들이,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낡아빠진 그대로 남아있다면 어쩌란 말인가요? 그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만 한다면, 훨씬 멀리, 아마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 순간에 나의 사랑하는 일본 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25년 동안 고민한 끝에 최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여기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이들이 똑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주가 문이 닫힌 우리의 여관을 스쳐지나가 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여기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이 있을까요?

 

여관에 관한 성탄절 복음은, 그 여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성탄절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렇습니다. 여기서 문을 “열면”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여관을 생각하는 경우에 성탄절 복음은 분명히 큰 질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