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경험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제의 글을 그대는 인정하시오? 말이 안 된다고 보는 건 아니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듯이 종교경험은 절대적인 사건, 즉 신비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적인 세계를 언어로 완벽하게 재구성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경험에 이른 길을 설명하라는 뜻이오. 사실은 그 길 자체가 절대적인 경험이기도 하오.
우리는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없소. 예수의 실질적인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소. 이 세상이 여전히 구원의 과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요. 이 말도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오. 미래에 예수의 재림이 일어나면 지금의 시간도 모두 그 사건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재림이 이미 일어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없소. 그런데 그대는 무슨 근거로 예수를 만났다고, 영접했다고 떵떵거리는 거요? 예수의 얼굴을 보았소? 키가 얼마나 되는 것 같았소? 예수 경험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도 인정할 거요. 우리의 예수 경험은 언어 경험이오. 예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오. 더 정확하게는 예수의 말씀이라고 초기 기독교가 전승해준 그 말씀, 또는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해석된 어떤 언어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를 말씀이라고 진술했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요. 언어, 이성이라는 뜻이오. 우리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곧 로고스를 만났다는 뜻이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요한복음 기자의 말이니 그대가 무슨 토를 달지는 못할 거요. 요한복음 기자는 왜 예수를 로고스라고 말한 거요? 성서의 로고스와 철학의 로고스는 동일한 거요, 다른 거요? 골치 아프다 하지 말고 생각해보시오. 이건 말하는 나나 듣는 그대의 영적인 실존에 속한 문제요. 우리가 믿더라도 뭔가를 알고 믿어야 하는 거 아니겠소? (2010년 12월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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