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과학’ 하면 머리를 쩔래쩔래 흔들지 모르겠소. 골치 아픈 학문이라고 말이오. 나도 마찬가지요.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교양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소. 이런 주제에 과학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는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해명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오. 그대는 혹시 자연과학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훼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어제 잠간 말했듯이 기독교가 먼저 과학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은 탓이 크오. 자연과학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과학 앞에서 유신론과 무신론도 따로 있을 수 없소. 과학자들은 순전히 과학의 언어에 충실할 뿐이오.
지금 자연과학계에서 신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호킹의 <위대한 설계>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옳소. 이런 세태 앞에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난감해하오. 과학자들의 말을 무조건 배격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갈 수도 없으니 말이오. 그래서 대개는 그냥 모른 척 외면하고 마오. 과학적인 이슈를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도 하오. 창조과학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진화론을 부정하오. 건강한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니 이런 주장은 일단 제쳐놓는 게 우리의 정신 건강에 좋소.
어제 나는 그대에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기독교가 해체되는 일은 없다고 큰소리쳤소. 그 근거를 충분하게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오. 이 짧은 글로 가능하지도 않소. 그냥 방향만 말하겠소. 과학이 인간의 영적인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날이 왔다고 합시다. 요즘 유행하는 뇌 과학이 그걸 담당하게 될 거요. 그것으로 모든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라오. 왜 그런 뇌 현상이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또 설명해야만 하오. 마치 지구의 지적 생명체가 나오게 된 과학적 근거가 과학적으로 제시되면 그것에 대한 또 다른 근거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오. 어떤 과학적 이론이든지 그것은 그걸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을 요구하게 되오. 숫자를 보시오. 조는 무한에 가까운 숫자요. 조를 수학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숫자의 비밀이 끝난 게 아니오. 그것보다 일이 더 큰 수가 또 있소. 우주의 원리를 다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너머에 대해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하오. 철학이 바로 그런 질문을 하고 있소. 만약 철학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오면 그때는 기독교도 큰 위기를 맞게 될 거요. 그렇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소. 올 수가 없소. 이 세상은 비밀 자체이기 때문이오. 그 비밀이 곧 하나님이라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기독교가 과학을 공정하게 대할 것인지, 아니면 독단에 빠질 것인지에 달려 있소. 이것이 바로 과학이 기독교에 기회가 되는 근거이기도 하오. 과학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독단론으로부터 벗어나서 진리론적 해석학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오. 우주 물리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어느 공간에 자리한 분이라고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소. 이런 것들은 기독교 역사에 많소. 기독교가 진리라고 한다면 그대는 그 어떤 과학적인 도전 앞에서도 두려워할 게 없소. 만약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과학의 도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오. 이런 점에서라도 오늘 한국교회는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오. 신학무용론이 팽배한 교회라고 한다면 공룡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소. (2010년 10월23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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