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예수의 교훈이 오늘 우리의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 대답은 윤리의 근거라는 철학적 문제가 비록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말론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정확히 논증해야만 한다. 이 논증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이 그 당시에 만인 구원을 대망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불행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표는 정정되겠지만 그 관점은 거부될 수 없다. 물론 예수의 윤리적 교훈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세대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이 근거하고 있는 종말론적 역동성이 이제는 기독교 윤리학에서 그렇게 큰 장애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 나라, 144 쪽)
어제 나는 예수 윤리의 급진주의가 오늘 현실에서 타당한지 생각해보라고 그대에게 말했소. 그것은 기본적으로 종말과 연결되오.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인간 삶을 조명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본다는 뜻이라오.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와 종말을 모두 통합적으로 바라볼 때만 가능한 개념이오. 하나님은 우주 전체, 역사 전체이기 때문이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종말에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곧 종말의 나라라는 뜻이오. 종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윤리적 급진성도 규정될 수 있소.
오늘 나는 가장 기본적인 신학개념만 말하겠소.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왔소. 연대기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종말은 오지 않았소.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생명이 불완전하다는 점에서도 그것은 분명하오. 종말은 아직 미래의 사건이오. 그러나 종말은 이미 여기서 시작했소. 종말을 생명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 생명의 완성이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했다는 말이오. 그런 말이 손에 잡히지 않소? 그럴 거요. 그 완성은 은폐의 방식으로 지금 여기에 개입돼 있기 때문이오. 죽음을 생각해보시오. 죽음은 분명히 미래의 사건이지만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한 거요. 우리가 지금 밥을 먹고 살아있지만 그것도 역시 죽음의 과정이라는 건 분명하오. 종말도 이미 시작했다는 말이 되오. 이런 종말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급진적인 윤리가 가능하오. 그런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달려가야 하지 않겠소?(2010년 6월19일, 토요일, 장마 잠시 주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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