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 책상 뒤쪽의 책장에 몇 장의 씨디가 눈에 띄오. 씨디 재킷에 먼지가 뽀얗게 앉았소. 아마 몇 개월은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소. 거기만이 아니오. 그대가 깔끔한 성격이라면 내 서재를 보고 기절을 할지 모르겠구려. 곳곳이 먼지요. 서재 청소는 대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진공청소기로 방바닥 먼지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이오. 두 주에 한번은 물걸레로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복사기 등을 닦소. 책장은 거의 손을 못 대오. 그러니 구석구석의 먼지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소. 평소에 내 눈에는 먼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보여도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 불편한 게 하나도 없소. 아마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모르겠소.
언젠가 티브이에서 시각장애인 부부의 사는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소. 그런 장애를 안고 있어도 그들은 밥 잘해 먹고, 아이를 잘 키우고 있었소. 어느 날 어머님이 집에 놀러왔소. 아들과 며느리 몰래 물걸레로 화장대 등등, 구석진 곳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소. 시각장애인 부부에게는 하나도 문제가 안 되던 먼지가 어머니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되었단 말이오. 그 장면에서 나는 먼지를 그냥 안고 사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평소의 생각을 굳혔소. 그까짓 먼지를 안 보고 살면 되지 않겠소?
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을 거요. 침대 매트리스 먼지는 진드기가 번식하는데 최적의 환경이라는 말도 있긴 하오. 그 외에도 먼지는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기도 하오. 가능한 집안에서 먼지를 없애는 게 건강하게 사는 첫 걸음일지도 모르겠소. 나도 먼지 구덩이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소. 내 말은 지나친 청결보다는 어느 정도 먼지를 안고 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거요. 현대의 청결한 환경이 오히려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소.
다른 말이 길었소. 씨디 재킷에 묻어 있는 저 먼지가 도대체 뭐요? 그게 어디서 왔소? 먼지의 정체가 각 가지이니 내가 그걸 일일이 밝혀내기는 힘드오. 어떤 물건에서 잘린 미세한 조각이라고 말하면 될 거요. 책에서 잘린 조각일 수도 있고, 휴지 조각이거나 낡은 옷의 조각일 수도 있고, 흙이 바람에 날려 온 것일 수도 있소. 봄의 불청객인 황사는 멀리 중국의 한 사막에서 계절풍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온다지 않소. 지저분해 보이긴 하겠지만 먼지를 이상한 눈으로 볼 건 하나도 없소. 그것이 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라오.
그대는 잊지 마시구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먼지를 우습게보고 있는 우리도 결국 먼지가 되고 만다오.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서의 말을 객관적 사실로 생각해야만 되오. 씨디 위에 깔려 있는 저 먼지가 바로 나의 미래요. 더 근본적인 또 하나의 사실도 기억하시구려. 지구는 우주의 차원에서 볼 때 먼지에 불과하다오. 지구라는 먼지 안에 놀라운 생명 현상이 일어나고 있소. 보기에 따라서 대단하기도 하고, 별 것 아니기도 하오. 우리가 먼지로 돌아갈 날이 속히 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지 말시구려. 그게 온 우주요. (2010년 6월17일, 목요일, 한국 축구팀이 아르헨티나에 1:4로 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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