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내일이 창조되다 (창 1:3~5, 14~19)

새벽지기1 2023. 5. 27. 06:49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선언할 따름입니다. 창조를 증언할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된 책임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이요, 모든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만물이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 만물이 창조되었는가?’에 초점을 둘 뿐입니다. ‘어떻게’라는 인간의 과학적 탐구로는 창조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두 알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반항입니다.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충분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흔적을 심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드신 모든 만물, 작은 피조물 속에도 하나님 속성 일부를 나눠 주심으로 그 중요성과 필요, 용도와 존재 목적에 따라서 흔적을 심어 주셨습니다. 가장 많이 하나님의 흔적을 담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타락 시키는데 초점을 둔 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반역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 반역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반역의 역사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반역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 6일 동안 과정을 거쳐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질서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봐도 창조 기록은 어떤 설화나 신화, 풍유가 아니라 역사적 계시입니다. 큰 틀에서 과학이 발견하는 진리와 전혀 배치되지 않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 삼일은 하나님이 형태를 만드시고, 나머지 세 날은 그 형태 안에 내용을 채우는 창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창조하셨습니다. 네 번째 날에는 그 빛의 통로가 되는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입니다. 두 번째 날에는 물을 공간 아래 물과 위의 물로 나누시고, 그 공간을 하늘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섯째 날은 하늘을 나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심으로써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세 번째 날에는 하늘 아래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함으로 드러난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습니다. 그 땅에는 식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날에는 그 땅에 존재하는 동물, 생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짝을 이루고,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짝을 이루고,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앞의 세 날은 형태를 만드는 창조였다면 남은 세 날은 그것을 채우는 창조였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매우 질서 있고 체계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려고 하나님이 순차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첫째 날과 네 번째 날의 창조를 연결하고, 앞으로 3주 동안 6일 창조를 살펴보고, 마지막에 인간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너지의 근원, 생명 지탱하는 ‘빛’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게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 빛은 태양 빛이 아닙니다. 태양은 네 번째 날에 창조된 것이기에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아닙니다. 도리어 태양이 빛나게 하는 빛입니다. 태양에 빛을 부여하는 빛입니다. 태양 빛보다 근원적인 빛입니다. 태양을 빛나게 하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을 창조하신 게 첫 창조입니다. 태양이 사라지면 온 세상이 어둠에 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으로부터 나온 빛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빛 되심을 표현합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도 “빛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빛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이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3절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빛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빛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창조된 빛입니다. 만물의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일서>와 <디모데전서>, <야고보서>에 나오는 빛이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빛이라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에 필요한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으로써의 빛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게 천지창조인데,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태양의 빛만 비춰지지 않아도 생물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식물도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고, 하늘로 자라는 것은 빛이 비춰야 합니다. 햇빛이 없으면 사람도 영양분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물론 노아 홍수 이후 자연이 파괴되어서 햇빛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빛이 생명을 주고, 지탱하게 하는 힘입니다. 병을 치료하는데도 빛을 사용합니다. 몸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태우고, 피부 치료도 빛으로 합니다. 레이저도 빛의 종류입니다. 빛이 가져다주는 생명과 에너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그 빛의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무지개가 빛을 투과할 때 여러 가지 색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을 연구하면 할수록 빛의 세계가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극히 일부분만 체험할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빛이신 하나님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고, 생명을 지탱하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다!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신 이유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진술을 받으실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습니다”(히 4:13). 
빛이신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어떤 피조물도 사람에게는 숨을 수 있어도 하나님 눈은 가릴 수 없습니다. 어떤 어둠 속의 일이라도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며,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빛이 생겼는데,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낮과 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사역에 반복되는 단어가 ‘나누다’입니다.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둘째 날에 물을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셨고, 셋째 날에 땅과 바다를 나누셨습니다. 이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양성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이 원래부터 두 개로 나뉘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원론’이라는 사상은 처음부터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가 동등한 힘으로 서로 싸우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게 여기 나옵니다.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별도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어둠조차 빛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어둠은 나쁜 게 아니었습니다.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통해서, 낮과 밤을 창조하심으로 시간의 흐름을 만드셨습니다. 빛과 어둠이 가져다주는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눈으로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것도 명암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색과 예술도 명암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입체적인 것도 빛과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빛과 어둠의 조화가 없었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공간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이 세상을 풍성하고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저녁과 아침이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날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하나님께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만물에게 필요한 것이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시고, 풍성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은지를 빛과 어둠의 조화를 통해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과 항상 함께 나오는 말씀이 “그대로 됐습니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던 이유는 말씀하신 그대로 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지켜보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계속 일하십니다. 
시간 그리고 공간의 창조
첫째 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심으로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간의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공간 속에 살면서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그런데 영원에 더 가까운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공간에 빼앗기지 않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마련하는 게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이 없으면 어떤 공간에 있어도 허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날마다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영원에 닿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보다 공간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에 감사하기보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멋진 자연에 들어가면 우리가 기쁘게 되고, 무엇인가 새롭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첫째 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통해서, 낮과 밤을 통해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넷째 날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빛을 세상에 비춰주는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것인데, 그것으로 인간을 위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공간에 빛들이 생겨 낮과 밤을 나누고 절기들과 날짜들과 연도들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게 하라’”(14절). 
여기서 ‘빛들’이라고 번역된 것이 광명체들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그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을 반사하고 나타내는 통로가 되는 광명체, 발광체들을 의미합니다. 낮과 밤의 흐름을 통해서 날짜와 연도를 계산할 수 있도록 표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첫 번째 날에 빛과 어둠을 통한 시간의 흐름이 창조되고, 네 번째 날에 광명체들을 통해 공간의 창조가 통합됩니다. 그래서 첫째 날 시간을 창조하시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날마다 ‘내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 내일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창조의 기록에서 또 반복되는 표현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입니다. ‘날’이라는 표현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창조의 시간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일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신학을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날은 우리가 생각하기 어렵고 판단하기 불가능한 종류의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벵도 “<창세기> 1장을 가지고 천문학과 심오한 학문을 탐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패턴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지, 창조의 연대를 계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6일을 창조의 날로 나누신 것은 창조질서대로 살아가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제7일째 안식하신 것은 6일 동안의 창조와 제7일 안식은 6일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휴일을 제정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 이전에는 휴일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항상 일하는 날이고, 주인들은 항상 노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하루 안식이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일종의 도피심리 매커니즘입니다. 창조와 진화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에 의한 게 아닙니다. 진화를 과학적 탐구에 의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출발을 모릅니다. 출발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느냐고 할 때 진화론은 항상 오랜 시간 동안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패턴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태양이 존재하기 전부터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창조되었습니다. 밤의 영역을 저녁이라고 하고, 낮의 영역을 아침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라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패러다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 속에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깨어 있을 때부터 하루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하루는 저녁부터 아침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모든 절기를 저녁식사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저녁 전까지 합니다. 일상에서는 안 지키지만 절기는 지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녁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어야 합니다. 하루의 출발을 하나님 안에서의 쉼과 안식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침은 우리가 세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해가 떴고, 하나님이 시작하신 하루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입니다. 우리는 저녁에 쉬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침에 깨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앞서 시작하신 일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아침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을 내가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 하나님이 밤새 준비하신 일을 우리가 아침에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녁에 지쳐서 쉼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따라가는 삶이 창조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일은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도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