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관점
누구도 역사를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도피한 채 살 수 없습니다. 자연인으로 산다고 해도 역사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가의 기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기록하는 이가 없다면 역사를 알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에는 사관이 있었습니다. 왕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대로 남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담보해야 했습니다. 또한 적나라한 기록으로 인하여 보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실에 기반하지만 역사가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지난온 시간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역사가의 편집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역사가는 앞선 시대의 역사가 진실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서 다음 세대로 남깁니다. 이 일은 끊임없이 진행됩다. 특별히 고 시대의 이야기는 유물의 발견과 함께 계속 첨가와 삭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역사는 지금도 계속하여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를 눈으로 보고 살았던 우리 역시 다양한 방해와 왜곡된 세력들로 인하여 정직한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치열한 역사가들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반박 불가한 사실로 드러난 역사는 수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몰상식한 나라가 됩니다.
역사를 볼 때 독한 창질과 같은 행위는 자본의 관점으로 보는 일입니다. 역사는 실제의 사건입니다. 실체적 진실의 관점에서 기록이 됩니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세워집니다. 그런데 역사를 자본의 관점으로 기록하고, 자본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나라가 요동칩니다. 자본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 즉 시장 경제의 관점입니다. 시장경제는 자본의 성공에 따라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법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만 중요합니다. 결과만 좋다면 역사속에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도 합리화 시킵니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 전두환정권 시절에 있었던 삼청교육대입니다. 깡패와 부량아를 잡아서 사회정화를 하겠다는 정책으로 운영하였던 기관입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갔는지 모릅니다. 바른 소리를 하여도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고 잡아가서 각종 폭행을 일삼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을 잡아서 사회정화가 되었다면 폭행이 정당화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역사를 이해할 때 사회정화라는 목적이 올바르기에 삼청교육대를 옹호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일그러지게 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권국가를 침탈하는 목적이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생긴 부산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상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승자들이 남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는 철저하게 그 역학관계를 살피고 피 흘린 자의 외침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하여 최선의 실체를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 땅의 역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의함에 슬퍼하고, 치를 떨고 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땅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에 재심이 존재하듯이 긴 역사의 시간에 바로 잡힐 것입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의 생명책에 진실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때 누구도 역사의 진실에서 피하여 갈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분명하기에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할 때 실증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사가와 그리스도인의 역사 이해입니다. 역사적 실체를 다층적으로 살펴서 해석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이해를 통하여 한 번더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세상은 알지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실증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더하여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역사를 바라봅니다. 신학적 역사는 선분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존재하고, 처음은 끝을 향하여 가는 역사입니다. 거기에 수없이 많은 순환이 있으며, 실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안에서 움직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혼돈의 시대에 바른 역사관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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