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나 한계상황에 도달하면, 아니 한계상황이 아니라도 예기치 않은 상황이나 감정을 뒤집어 놓는 문제에 부딪히면 숨어 있는 무서운 야만성이 드러납니다. 동물은 본능에 충실 하게 살아갑니다. 본능 이상도 아니요, 본능 이하로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일 뿐만 아니라 본능 이하로 추락합니다. 흔히 먹기를 탐하는 사람을 ‘돼지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돼지는 일정 부분 이상을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항상 비워놓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능에 충실해도 위를 채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식도까지 채울뿐 만 아니라 먹었던 것을 토해내고 다시 먹습니다. 부패했던 중세나 로마시대를 보면 먹었던 것을 토해내는 쟁반을 가져다 놓고 또다시 먹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본능 이하의 모습입니다. 동물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야만적이고, 추악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겉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우리 안에는 무서운 야수와 같은 본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첫째, 인간은 조금 부족할 뿐이고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둘째, 인간이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시각입니다. 셋째, 성경의 견해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견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긴 논증을 했습니다. 이방인들의 뻔뻔스러운 탐욕과 불의함을 지적했 고, 남들보다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산다고 여기는 위선적인 불의함을 증거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자기과신과 그들 속에 나타나는 불의함을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그룹을 지적한 이유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더 낫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했습니다”(9절). ‘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 있다’ 는 것은 어떤 세력 아래에 정복되어 있고, 지배당하고 있고,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세력에 의해 노예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 앞에 섰을 때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죄의 세력을 뚫고 들어가 그 세력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인간은 여전히 죄의 세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중반부에서 ‘죄의 종’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바로 그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두 곁길로 행해 다 쓸모없게 됐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10~12절). ‘없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점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습과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아래에 있는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억제하고, 인간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자꾸 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인간은 죄악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망가뜨리며, 지옥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적인 타락을 억제하시고,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주셨음에도 인간은 죄 아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죄 아래 있는 상태를 고발하면서 구약 곳곳에 예언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매우 의도적입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번 강조하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구약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러분, 죄는 인간의 신체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해부대에 올려 놓고 해부하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가장 많은 타락 증상이 어디서 나옵니까? 인간의 말입니다. 우리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범죄가 가장 잦습니다. 우리 말에 얼마나 많은 거짓이 포함되어 있고, 우리의 혀와 입술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독이 얼마나 많은지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죄는 우리의 발까지 영향을 미쳐서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평강이 없는 길을 걷는 발걸음이 됩니다. 우리의 눈 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거룩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 당시 이교도들은 바벨론과 헬라 그리고 로마의 수많은 이방신을 두려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다를 두려워하고, 강을 두려워하고, 산을 두려워하고, 나무를 두려워하고, 바위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 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우리를 두렵게 할 게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죄는 우리의 눈부터 발까지 모든 기능을 마비시키고 왜곡시켰습니다.
존 헨리 쥬엣이라는 목사님이 ‘죄가 우리의 모든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잘 해설했습니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맹목적으로 일하게 만든다. 청각을 마비시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죄는 미각을 왜곡시켜 단 것을 쓴 것으로 혼돈시킨다. 촉각을 마비시켜 과거의 느낌만을 갖게 한다. 교회는 영적인 모든 좋은 감각을 막아버리고 질식시킨다. 죄는 무감각을 만들어 낸다. 영혼을 짓밟음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태어났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몇 개월 지나면 천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인간의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걸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이유는 절망에 빠지도록 하는게 아닙니다.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결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죄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요, 놀라운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죄 아래 있는지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심판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등한 표현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이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19~20절). 하나님의 은혜로 붙잡아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인간의 가능성만 믿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의 심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멸망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 목적입니다. 이 시간과 영원을 연결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 아래 설 때 우리는 구원자를 찾게 되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사도 바울이 긴 논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아래 있는 우리를 은혜 아래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통로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지 않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무서움, 심각함, 타락함, 부패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될 때 주의 은혜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세교회의 역사가 교회의 가장 어두운 역사입니다. 천년 넘게 교회가 타락한 모습의 극치를 세상에 보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 세상이 타락합니다. 역으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세상이 거룩하게 바뀝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포장하고,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 교회마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교회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짓밟히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가 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 완전히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는 죄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 힘으로 죄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없습 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세가 아니고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극히 타락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들려올 수 있도록
우리의 타락을 온전히 깨닫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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