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죄 아래 갇혀 있는 인간은 결코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주십니다. 로마서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용서로 하나님이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용서를 통해서 회복에 이르게 합니다. 잘못한 자를 처벌하고, 징벌하는데 그치는 의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죄에 대한 마땅한 징벌을 지급하고,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해 연합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로마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언제나 이 두 단어를 혼용해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아닌 그 무엇을 첨가한다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구약의 두 인물을 인용합니다. 그 인물들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 만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두 인물은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이 두 인물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이 구약 시대를 관통하며 사용하신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육신의 조상, 혈통적 조상, 민족의 조상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주 거론하지만, 그에 대한 심각한 오류와 오해, 왜곡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율법 신앙의 대표적인 개척자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율법의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인물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쳤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보다 불순종한 모습이 더 많습니다. 그의 믿음이 처음부터 온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확신을 하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불순종과 불신앙, 의심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지 않고, 랍비를 통해서 재해석된 탈무드나 미드라쉬, 이 두 가지를 해석한 여러 지침서로 종교화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나를 찾아오는 선물
“‘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따라 우리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라고 합니다” (1~3절).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시점이 형제 하란이 죽었을 때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섰을 때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가족의 죽음 앞에 영혼이 민감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 함의 믿음은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 뜻에 따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멈춰 섰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고, 그 자손을 번성케 하시고, 그 자녀를 복되게 하심으로 땅의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품은 비전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 적으로 찾아오셔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이끌려갈 뿐이었 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이미 75세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약속이고, 자신의 형편을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힘없는 이주민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모든 족속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기 어렵고, 상상하기 힘든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약속을 처음부터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끌려가는 믿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이르러 약 10년이 지났을 때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 님께 건의합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서 네 자손이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라 너의 후손이 이렇게 많아질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조차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그런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창 15:6). 성경에서 ‘믿음’ 과 ‘의’ 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구절이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모델은 단순한 믿음의 모범 정도가 아니라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판단, 감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대상이 나를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겨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루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 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창세기 22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러번 부침을 겪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불신앙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분명히 믿었다고 했는데, 16장에서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믿음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 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일어나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있어야 하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믿음조차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때 두 가지 일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어 놓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 안에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믿음 자체를 일으켜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믿음 만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조차 파괴된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이 믿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선물해 주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복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하기를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 니까? 할례를 받은 때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다”(9~10절).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건은 할례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입니다. 창세기 순서 자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받은 이후 14년이 지나서야 할례 제도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증거처럼 여겼던 잘못된 오류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앞에 의롭게 되는 증거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인쳐지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자의 조상이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정당한 대가로 여겨지나 일하지 않고도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 니다”(4~5절).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 심은 것을 거두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보상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도울 수 없는 영역의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종교의 원리는 한마디로 보험과 같은 원리입니다. 보험금을 내면 나중에 문제가 있을 때 보상금을 받는 구조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원리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 다 이루어진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종교적인 보험의 원리로 내가 행한 선행, 내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신앙의 왜곡입니다. 철저하게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근거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봉사, 선행, 헌신도 이것을 기초해서 출발해야만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는 축복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증거로 인용한 인물이 다윗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복에 대해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6~8절). 다윗은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의 아내와 간통하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이는 끔찍한 죄를 범 했습니다. 다윗이 깊은 죄에 빠져 있다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회복의 길을 걸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그 죄가 씻겨진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교활함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시 32:1~2). 죄를 짓고 난 이후에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을 때 겪었던 고통도 고백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가물에 마름같이되었나이다”(셀라)(시32:3~4절). 정죄함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고백합니다. 다윗이 용서받은 죄는 간음과 살인죄만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 자체 가 포함된 원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죄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임한 새 생명이 성령의 능력으로 타락한 옛 생명을 끊어내고 몰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필요하고, 성령님이 필요한 이유는 참된 회개를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옛 성품을 못 박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옛 생명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게 먼저입니까? 아니면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 먼저입니까? 이 순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의롭다함이 먼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직 원수였을 때, 아직 회개하지 않고 불경건한 상태였을 때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 게 되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단 우리가 회개할 때 그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복음이 들려질 때 사람들이 회개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용서받는 정도가 아니라 하 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을 주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많은 허물과 죄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다윗을 자유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두 예화입니다. 오직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어떤 일 이 일어나는지, 어떤 복이 임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의롭게 하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복을 날마다 누리며 체험하기를 축원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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