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9장 나를 부르짖으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새벽지기1 2021. 8. 13. 06:35

응답이 없다! 우리가 꽉 닫힌 문 앞에서 있을 때 문이 열리지 않아 우리로 하여금 걱정하게끔 한다. 그때 우리는 점점 더 세게 두드린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더 큰 소리로 부른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대답하는 음성도 나지 않으면, 우리가 방안에 틀림없이 있으리라 알고 있는 어린 아이, 또는 아마도 형제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반응이 없다! 우리가 아주 곤란한 때에 도움을 청하고 기다렸으나 여전히 회답이 오지 않을 때에 너무 자주 희망이 변하여 절망에 빠지게 된다. 회답을 받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나 형제에 대해 궁금해서 소식을 알고자 편지를 쓰고 또 썼으나 소식이 오지 않아 전보의 반신료를 선불하나 여전히 회신이 오지 않는 때에 아주 불안하다.

 

응답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식구 중 한사람이 중한 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그의 병상에 다가가서 처음에는 속삭이는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나 알아듣지 못하자 그 다음에는 좀 더 큰 소리로 그렇게 하다가 결국 그는 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마음이 오싹하게 된다. 

 

응답을 얻지 못한다! 광산이나 터널을 파는 경사지에서 사고가 나 피해자들이 파묻혀 버리게 되어 사람들이 밖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고는 숨을 죽여 가면서 안에서 어떤 소리 나 살아 있다는 신호가 들려올까 하고 기다리나 침묵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당황하게 된다. 

 

응답이 없다! 얼마 전에 마르티니크(Martinique)가 지진으로 전복되어 그곳의 상태를 알고자 전신을 보냈으나 전혀 아무런 종류의 신호도 받지 못했을 때에 그러한 두려움이 야기되었다. 갈멜 산 위에서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용답하소서"하고 외친 바알 선지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들은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고 칼로 몸을 상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왕상 18:26). 그리고 엘리야가 그들의 옆에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라고 외치자 응답을 받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더욱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항상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시편 83편 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에 나오는 아삽의 호소를 읽어 보라. 시편 28편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에 나오는 다윗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더 강렬한 것으로 ‘라마 사박다니'' 즉 시편 22편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에 담겨진 선지자적 호소의 메아리를 기억하라.

 

이 세상의 형식적인 종교인과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간에는 차이점이 많다. 여기에서 철저하게 세속적인 사람에 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사람은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응답을 구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이 모두 다 이와 같지는 않다. 상당수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 역시 어느 정도 종교적 형식을 갖춘다. 그들은 기도를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기도를 거의 습관적으로 한다. 그들은 식사 때에 주로 속삭이듯이 기도하며 밤에 자기 전에는 기계적으로 감사를 드리며 몇 마디 기원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어 죽게 되었거나 또는 사업의 실패를 맛본) 고통스럽고 걱정되는 때에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다시 살아난다. 그때 그러한 사람은 실제적으로 기도하게 되며 하나님께 울부짖게 된다. 그러다가 그러한 부르짖음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면 곤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고 격분하여 뒤로 물러서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선자에게 있어서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추구한다. 그는 이 땅위에서 조차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동행"에 대해서 안다. 은혜스러운 체험을 통해, 그는 이 은밀한 동행에 있어서 교제는 상호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역시 그분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려 하시는 것이다. 

 

그때에 비록 그는 “하나님께서 여기 또는 저기에 계신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것이며 자아기만이 아니라 풍성한 현실인 것이다. 그는 선한 목자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면서 앞서 가시는 분의 목소리를 듣고 막대기와 지팡이로 안위함을 받는다. 세속적이며 형식적인 종교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순전히 물질주의이며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거룩하고 아주 은혜스러운 신비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신비주의에도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멀리 있는 사람과의 교제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현재 우리는 수천마일 떨어진 사람과 연락하며,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눈으로 볼 수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며 그가 답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진보하여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무신전선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무선전신 이 방해를 받고 중단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땅위에 사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늘에 계선 아버지 하나님과 신비한 전선술, 신비한 전화와 같은 신비스러운 의사소통을 누린다. 옛날 사람들이 전신술에 의한 대화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신자가, 먼 곳에 계시면서 또한 가까운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이 신비스러운 대화를 알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대화가 방해를 받을 때도 있고 때때로 완전히 중단되는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그분을 찾고 심령이 그분을 간절히 바라나 아무런 응답이 없고 하늘에서 전혀 징조가 비치지 않아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 같으며 단지 침묵만 흐를 분일 때가 있다. 응답이 없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는 이유에 대해 추측은 할 수 있으나 깊이 알 수는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십자가상에 서의 예수의 부르짖음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측해 봄 여지가 충분하다. 여러분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보통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서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분께 가까이하고 있다는 복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아침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여러분의 심령과 영원하신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교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귀머거리처럼 행하지 마소서. 왜 저의 기도를들어 주시지 않으십니까!" 

 

허나 이 자포자기적 감정 속에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제의 중단은 마음의 죄악, 하나님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은밀한 죄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다. 아니면 여러분의 심령이 많은 일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의 내적 생명의 중심부에서 물러갔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손해는 여러분에게 이로운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은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고 심령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끔 된다.

 

신체 상태가 또한 이 교제의 감정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심한 두통을 앓고 있어 영혼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감수성을 둔화시킬 때와 같은 경우에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육신적인 휴식과 평온함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올 나타내 준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의 내적 생활에는 아무런 잘못이 발견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여러분에게 물러가신 것이다. 그런 경우조차도 우리는 그 원인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주 흔한 일로서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과대평가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과 은밀히 동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때때로는 그가 이러한 교제를 추구하는 것을 특별한 경건으로 간주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거룩한 은혜가 평범한 일로 여겨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치는 그것이 죄 많은 이 땅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는 것을 안다. 한동안 영혼이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게 될 때에, 이 은밀한 교제는 한층 더 가깝고 부드러운 축복이 넘치게 되며, 영혼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헤엄치게 된다. 

 

이 땅위에 사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늘에 계선 아버지 하나님과 신비한 전선술, 신비한 전화와 같은 신비스러운 의사소통을 누린다. 옛날 사람들이 전신술에 의한 대화를 알지 못했던 것 처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신자가, 먼 곳에 계시면서 또한 가까운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이 신비스러운 대화를 알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대화가 방해를 받을 때도 있고 때때로 완전히 중단되는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그분을 찾고 심령이 그분을 간절히 바라나 아무런 응답이 없고 하늘에서 전혀 징조가 비치지 않아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 같으며 단지 침묵만 흐를 분일 때가 있다. 응답이 없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는 이유에 대해 추측은 할 수 있으나 깊이 알 수는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십자가상에 서의 예수의 부르짖음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측해 봄 여지가 충분하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