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
우리 인생에 있어서 밤은 신비이며 미지의 문제로 남겨져 있다. 수세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잠이란 7, 8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삶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잠시 삶에서 뒤로 물러 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베개를 베고 누운 후 곧 잠이 들어 다른 세계로 가버린다. 그러다가 시계 바늘이 깨어날 시간을 가리키면 일어나서 다시 생활을 시작한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이따금 자면서 꾼 꿈을 기억할 뿐이고 나머지는 전혀 공백 상태인 것이다. 무의식 속에 빠진 재로 보낸 7시간은 홀러가 버리고 그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시간, 기껏해야 세 시간 정도에 불과한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인생의 삼분의 일은 지나가 버린다. 서른 살이 된 사람은 실제로 이십년 밖에 살지 못한 것이며 다른 10년은 수면의 안개 속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잠이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곤한 사람이 휴식을 취한 후에는 새로운 힘을 부여받고 일어난다. 잠들어 의식할 수 있기까지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생각, 느낌, 의지작용, 활동 모든 것이 정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이 삶의 절대 정지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건강하며 힘이 왕성하며 걱정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을 때에 잠을 자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정해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비록 여러 시간의 작업 후에는 피곤해져서 힘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나 이것이 문제의 답변은 아니다. 우리 인간의 창조주 되시며 그분의 형상을 좇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약해지지도 피곤해지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왜 힘이 소모되어 피곤해지는가?"라는 질문이 대두되는 것이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다시 밤이 없겠고"(계 22:5). 그러므로 계속해서 힘이 다해지지 않으므로 잠잘 필요가 없는 존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힘의 소모를 회복하기 위해서 잠을 자야 하는 삶을 주신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록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긴 하지만 이러한 주님의 규례는 목적과 지혜로운 계획 없이 무모하게 반포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이 땅 위에서의 생활의 삼분의 일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삶의 무의식으로 삭감된다. 그러나 성경은 밤에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잠은 여기에서 고상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닐까?
틀림없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평범한 경험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비밀 장소 안에서 영적 교훈을 위한 7시간 또는 그 이상의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시간은 전혀 균형을 잃게 될 것이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낮 시간)가 하루 중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생각해 보기만 하라. 게다가 이것은 단지 일곱 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해도, 하루 24시간 중에서 우리는 이 시간을 잠자면서 보내게 된다.
이것은 단지 병 또는 지나친 근심거리나 나이가 들면서 조정 된다. 이들 세 가지 원인들에 의해서 잠은 짧아지거나 방해받거나 지연되며 밤의 일부분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실로 그때에 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람이 잠자지 못하게 되거나 또는 잠이 수시로 깨거나 아니면 너무 일찍 깨버리기 때문에 말이다.
꿈은 또한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꿈에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도 있고 그것에 의해 우리가 실 생활에 도움을 받게 되는 것도 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는 사랑하였으나 사망해 버린 사람과의 순간적인 교제를 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씁쓸한 즐거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계시해 주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잠을 깬 때에 꿈은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기억에 남을 때도 단지 몽롱하고 사라져가며 복합적이 영상들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인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이여, 잠 잘 때에 내가 당신을 사모하게 하시고 꿈속에서 나의 기쁨이 되소서’’라는 고대의 저녁 찬양시의 기원 조차도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꿈의 내용을 명백히 보여 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게, 잠자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 사역하시며 우리의 내적 삶을 조성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언급하거니와 밤에 일어나는 우리 삶의 신비는 능력 많은 하나님의 사역들을 숨긴다. 그것들은 우리 의식 세계의 범주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전날 밤에 우리를 괴롭혔던 난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의 이해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 우리들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3).
아니다. 밤에 우리의 삶은 단지 병, 염려 또는 나이가 많아 정상적인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만 의식적인 의미를 가진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 ;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시 77:6) ;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 또 욥이(욥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보다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배움의 과정인 것이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다음날 온종일을 침울하게 만드는 염려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 방법에 따라서 죄를 짓게 하거 나아니면 영광스럽게 해 주는해악인 것이다.
만일 잠을 못 잔 것 때문에 그 다음날에 우울하고 투정스러운 불평만 늘어놓고 밤이 되면 거듭해서 반항적으로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거리게 된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반면 만일 밤에 깨어 있는 시간을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영혼의 내적 삶을 영화롭게 하게 된다. 게다가 잠 못 이루는 경우를 그렇게 경건하게 활용하는 것은 잠을 청하는 치료약인 것이다. 반면 쉴 새 없이 반항하면 더욱더 잠을 잘 수 없게 될 분이다. 잠 못 자는 한 시간 동안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우리를 들뜨게 하고 반감을 갖게 하므로 더 심각한 불면증에 걸리게 한다. 그러나 반면에 잠 못 이루는 시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휴식을 누리고 마음의 평정을 이루며 또 잠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단지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잠 안 오는 밤 그것 자체는 하나님을 구하기 위하여 정해진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잠 못 이루는 시간은 시편 기자의 “하나님 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구절을 적용시키는 기회인 것이다. 우리는 힘에 겨운 활동,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잡음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로 말미암는 분주한 삶으로 인해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밤에는 그쳐진다. 관심을 끌 일이 없으므로 눈은 쉴 수 있다. 밤의 평온함이 귀를 임무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우리를 압박해 오는 일이 없는 것이다. 서두름과 재촉이 진정된다. 우리의 관심을 빼앗거나 우리를 피곤하게 하거나 억류 하는 것이 전혀 없다. 모든 주위 환경, 평온해진 마음과 고요함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촉진시켜 준다. 다른 어떤 때보다 그런 밤 한 시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막으로 들어가게 끔 해 주는 것이다. 밤은 그 속에 안식일에 누릴 엄숙하고 고요한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조용한 환경은 저녁 성경 읽기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붓는 저녁 기도로 말미암아 조성된다. 그 때 여러분은 쉬고 있는 것이며 여러분의 한 가지 관심은 괴로움 때문에 소파에 주저앉아 버리게끔 했던 낮의 염려들을 잊어버리 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께서 당신을 위하여 가져오신 것들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소관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정은 반드시 양편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동시에 여러분께 다가가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그분과의 교제를 즐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분을 만날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단지 내게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지 않는다. 또 충분한 겸손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분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이 못된다. 교제란 훨씬 더 진지한 것이며 여러분이 그분과 교제하게 되면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며,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자신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만큼 선하고 경건하지는 못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오심은 그분의 거룩하신 긍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까이하심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서 여러분을 풍요롭게 하며 복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여러분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감정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의 즐거움이었으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경우 아주 큰 유익이 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사망의 밤을 맞을준비를하게 해 준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때 결코 다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밤에 침대 위에 누웠으나 잠을 이룰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왜소하게 느낀다. 외모를 꾸미고,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유지하고자 애쓰는 대로 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낮보다 훨씬 더 하찮게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동작을 취하지도 않고 이동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외모의 하찮음과 초라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위대하게 되시는 것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실로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영원하신 사랑의 팔이 우리를 떠받쳐 주고 감싸 주신다. 기쁨이 영혼의 우울한 기분을 내어 쫓고 즐거움이 살을 에어내는 고통을 몰아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존경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실 때에 우리의 심령 깊은곳에서는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고백을 하게된다. |
“하나님께서 항상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분을 만날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단지 내게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지 않는다. 또 충분한 겸손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분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이 못된다. 교제란 훨씬 더 진지한 것이며 여러분이 그분과 교제하게 되면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며,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자신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만큼 선하고 경건하지는 못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오심은 그분의 거룩하신 긍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까이하심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서 여러분을 풍요롭게 하며 복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여러분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감정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의 즐거움이었으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경우 아주 큰 유익이 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사망의 밤을 맞을준비를하게 해 준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때 결코 다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밤에 침대 위에 누웠으나 잠을 이룰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왜소하게 느낀다. 외모를 꾸미고,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유지하고자 애쓰는 대로 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낮보다 훨씬 더 하찮게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동작을 취하지도 않고 이동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외모의 하찮음과 초라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위대하게 되시는 것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실로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영원하신 사랑의 팔이 우리를 떠받쳐 주고 감싸 주신다. 기쁨이 영혼의 우울한 기분을 내어 쫓고 즐거움이 살을 에어내는 고통을 몰아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존경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실 때에 우리의 심령 깊은곳에서는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고백을 하게된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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