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이나 자신의 내적 존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것의 출처에 따라서 다르다.
그것의 일부분은 스스로 얻은 것이고 또 일부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만일 이 두 가지 자신에 관한 지식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의문이 나면 이 차이점을 상기하라. 여러분은 부지런히 자신 안에 있는 선에 관한 지식을 획득한다. 이에 반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지적하신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어린아이에게서 본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는 남에게서 받은 칭찬은 쉽게 받아들이고 달콤하게 간직한다. 그러나 그가 잘못을 지적받게 될 경우 은밀해지긴 하나 불쾌하게 여기며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고 꾸지람을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양심이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자아비판올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계속 이런 가운데 있다.
조금 자란 뒤에는 이것이 보다 은밀해지긴 하나 실제적으로 과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릴 적에는 속에 있는 생각을 그렇게 많이 말로 나타내지 않는다. 비록 어떤 아이들은 속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나타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친구들에게 사생활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며, 아마 우리가 간과하지만 양심에 대한 엄한 교훈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차이점은 아주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대부분 우리는 양심으로부터 이러한 교훈을 추구하거나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으며,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거슬려 이 지식을 반복해서 가르치면 그제서야 그 교훈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전 일생에 걸쳐서 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의무적으로 가르치시려 하나 사람들이 전혀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은 그 가르침을 잊어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들에 대해서 교훈해 주시는 것의 일부분을 유유히 거부해 버리는 일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게 확실한 자아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 하며 자신들에 관한 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한다. 그들은 거울로 희미하게 보이는,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증오하며, 참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될 때까지는 계속 쉬지 않고 추구해 나간다. 하나님께서 양심 속에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귀담아 듣는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교훈을 경고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의해서 유익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 고귀한 은혜가 임하면 한층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기꺼이 청종할 뿐 만 아니라 양심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욥 34:32)라는 의미심장한 기도를 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여러분은 모든 부문에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두 부분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스스로 얻은 지식과 그 반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지식이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은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에 관한 지식의 첫 부분을 관찰에 근거한 것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지식과 나란히 또 다른 부분의 지식이 있는데 이 지식은 결코 우리가 스스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다 이와 같다.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은 관찰하고 정보를 얻고 조사하며 자신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이리하여 자연과 삶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 이에 관하여 어느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좀 더 예리한 눈, 좋은 귀, 더 귀한 발명 능력과 더 큰 불굴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 결과로 더 부강하게 된다. 그러나 주로 이 모든 지식은 인간이 보는 것에 달려 있다. 그것은 관찰을 토대로 한다. 그 지식은 사고에 의해 발전된다.
이에 덧붙여, 하나님께서 직접 그리고 이중으로 부여해 주시는 방법에 의한 지식이 있다. 우선 민족들간에 비범한 인물들을 세우심에 의한 것이고 그 다음은 발견물들을 허락하심에 의한 것이다. 비범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은 피조물인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받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인간의 지식은 그들이 없었더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정도로 심화되고 풍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발견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늘 신비스러움이 있고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지식의 영역들을 개척하여 준다. 불신자들은 그 발견들을 운으로 여기지만 믿는 신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감사히 여긴다. 여기 또 다른 생각이 등장한다.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이상주의를 지향할 때 고상한 목표는 진리와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 가장 가능하고 강력한 동기들 중의 하나이다. 이 이상주의적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단조로운 물질주의 지식을 갈망하게 될 것이며 인간 삶에 있어 보다 더 귀한 것들에 대한 지식은 무시해 버리고 만다. 돈 귀신은,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그럴듯하게 유혹한다. 그러나 거기에 말려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과연 인생에 있어서 참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한 더 고귀한 지식을 좋아하겠는가? 귀먹은 사람치고 바흐와 같이 훌륭한 음악가들의 음악이라 할지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맹인들 중에서 라파엘이나 렘브란트와 같은 대화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은 개인에게아 또한 민족에게 있어서 똑같이 사실인 것이다. 한 민족이 이 이상주의 관념을 갖지 못하면 그들은 물질주의와 감각주의로 떨어지게 되고 모든 고상한 삶으로부터 단절된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민족들을 발전시키거나 풍부하게 해줄 수 없다. 자신들마저 퇴보하게 되며 그에 따라 다른 민족들에게 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똑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를 나타낸다.16세기에 네덜란드는 특히 우월하였으며 모든 서부 유럽에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18세기에 반대로 그들은 타락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민족들에게 전혀 기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상주의가 어느 민족에게 강하고 고무적으로 작용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민족에게 그 고귀한 목적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시면 그 사람들은 더 고상한 목적들을 위해서 생활하기 시작하게 되고 더 순수한 인간 존재에 대한 지식으로 풍부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입김을 거두어 가시면, 그의 이해력은 둔화되어지고 모든 고귀한 지식은 사라져 버린다.
이상주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삶의 온기의 일부를 전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어느 민족으로부터 뒤로 물러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힘대로 행하게 하실 수 도 있다. 그때 그들은 모든 고상하고 높은 지식을 잃어버린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 다시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자신이 둘러보고 관찰하여 스스로 소유하게 되는 부분과 또한 하나님 홀로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보다 더 고상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지식의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당신 자신과 개인들에게 적용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곧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지식은 단지 양심에서만 솟아냐오는 것이 전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전혀 다르고 훨씬 더 큰 스케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지모(counsel)로부터, 그리고 또 얼마간은 그분이 여러분의 정신과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분들을 닮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의 인격, 기질, 성격, 우월한 성향 등을 조성 하신 분은 바로 그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 안에서 고상한 지식에 대한 열망, 더 귀한 배움에 대한 경향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서 생겨 나는 충동은 여러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추진하시는 역사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격려하시며 주장하시는 더 높은 차원의 추진력에 의하여 지식의 열매를 얻게 된다.
환경이 이것과 상호작용한다. 여러분은, 고상한 인격이 여러분에게 영감(inspiration)을 주는 한 친구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사람들과 더불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귀한 일들을 하게끔 격려해 주는 체험들과 교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성가신 일 괴로운 슬픔, 또는 무거운 책임이 여러분에게 지워질 수도 있으나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은보기 드문 향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러분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그러나 특히 여러분은 자신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려는 강한 욕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적인 허영된 일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신비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내적인 하나님의 주장을 깨닫게 해 주신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삶에 있어 더 귀한 일들에 관심을 갖게 해 주고 그 안에서 성숙하게끔 해주며 거듭해서 여러분을 그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한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올리는 분은 여러분이 아니고, 또한 그 밖의 어떤 사람도 아니고, 단지 여러분을 그분 자신께로 이끄셨던 하나님이신 것이다. 왜 여러분이 나 또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이런식으로 여러분 역시 자신에 관해서 두 부분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 부분은 여러분 자신이 보고 관찰하는 것에 의한 것이고, 또 다른 고상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더 고상한 은혜가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작용할 때에 가장 풍성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더 고귀한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은사들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신자들은 더 귀한 삶에 대한 신비스러운 것들을 체험할 모든 능력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감정적인 방식으로 신비스러운 것을 체험하므로 지식이 계속해서 제한된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방법에 관해서는 충분히 깨닫고 있지만 더 고상하고 귀한 인생의 지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또 아주 기쁘게도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인 감수성, 풍부한 신비적 체험, 그리고 구원의 지식에 대한 뚜렷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 뿐만 아니라 더 고상한 인간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어 더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고 또 고귀한 이상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양 빛 위에 있는 어떤 빛이 그 위에 떠오르게 되고 그의 지식은 성인들이 도달한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심오한 절대적 신뢰감과 훨씬 더 큰 지식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 진다. 그 갈망이란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나를 더욱 교훈하소서”에 나타냐는 간절한 소원인 것이다. |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좋은 말씀 > 카이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장 나를 부르짖으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0) | 2021.08.13 |
---|---|
제8장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 (0) | 2021.08.12 |
제6장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0) | 2021.08.10 |
5장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2) (0) | 2021.08.09 |
제5장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 (0) | 2021.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