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10장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새벽지기1 2021. 8. 14. 07:07

옛날 연세가 높으시고 신앙이 좋으신 분이 평화스러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경로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은 흔하였다. 

 

그때는 그러그러한 때에 “나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이러한 표현이 변하였다. 즉 사람들은 “이러 이러한 방식으로 깨달았다” 또는 “나는 그때 거기서 회심하게 되었다" 아니면 “그때에 나는 나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다” 또는 ‘‘이리하여 나는 냐의 구세주를 발견하게 되었다",등 자신의 영혼 속에서 일어났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어휘를 사용했다. 

 

이러한 모든 표현 방식들은 각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라는 옛날식 표현 방법이 결코 후시대의 표현들보다 진실, 깊이, 열정 면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1)는 호세아 선지자의 애닮은 호소를 확증하셨다. 

 

그러나 깊이 관찰하지 않고는 결국 “나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라는 말을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비스러운 배경과 동떨어지게 되며 외적이고 지적이며 교리적인 지식에 불과한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확실히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 그리고 그분의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반복하여 이것에 관해서, 우리 주님의 말씀 -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 이 잊혀져서는 안된다. 이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우리에게 비춰지는 빛을 내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똑같이 다음의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심오한 영적 실재를 내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생각들을 명백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리와 교의에 관한 추상개념들과 영혼과 영적인 체험의 지각작용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상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남아 있지만 영혼과 영적인 체험의 지각작용은 점차적으로 잊혀지게 되었다. 이 지식은 형식적이고 교리적인 설명의 수집품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에 관한 어떤 교리를 가장 인상적이며 명백하고 철저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가장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영원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혜스러운 삶을 체험하려는 영혼은 다른 극단주의로 홀러가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연관시킨 신비주의에서 신앙을 추구하게 되었다.

 

극단적인 신비주의에서 과연 만족을 찾을 수 있었는가? 역시 부분적인 이익을 얻었을 뿐이다. 단지 머리로만 복잡한 교리를 추구했던 지성주의 기독교에서 보다 부드럽게 구원사역에서 힘을 얻으며 구속의 감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비주의 기독교를 따를 때에 영혼의 내적 상태는 훨씬 더 좋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장 최선의 길은 아닌 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이 교리적이면서도 신비적인 양 측면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심은 훨씬 더 완벽하고 열성적인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능한 한 우리가 친구들에게 갖는 것과 같은 친밀한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연에는 언어가 있다. 동물세계에서 우리 인간에게 뜻을 전달해 주는 언어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언어는 그것이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동물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르며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얼굴, 얼굴표정은 이야기해 준다. 전체적인 표현, 특별히 눈을 통하고 눈에 의해서 말한다. 눈은 몸의 창문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본다. 다른 사람은 눈을 통해서 우리를 보고 조사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다. 

 

얼굴에 비해 몸의 나머지 부분은 벙어리이고 활기가 없는 편이다. 손의 제스처가 자신의 뜻을 남에게 전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남부 유럽인들은 말할 때에 항상 손동작을 하여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또 사실상 격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신을 움직이면서 감정을 냐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얼굴로만 이야기하고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의사를 더 세련되고 선명하게 나타내려 한다는 기정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시장 길목에 서 있는 부랑아는 손짓, 발짓을 다하며 이야기하나 보좌 위에 앉은 왕은 표정과 얼굴의 위엄을 가지고 더 많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연적인 결론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할 때 “하나님의 얼굴”이란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그분의 눈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과 분노하여 코로 숨쉬는 것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함으로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자신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과 만날 수 있는 특권 이외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 노인의 모양으로 나타내는 등의 물질적인 방법으로 취해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세도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안다.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담대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응답하셨던 것이다.

이와 갇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 땅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미지의 상태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얼굴은 육체임을 나타내 주는 데 하나님은 영인 것이다. 

 

사실은 이와 같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아주 골똘히 지켜보면 마침내 우리는 그의 내적 자아를 파악하게 된다. 그때의 외적인 얼굴은 단지 그의 내적 본질에 관해 알게 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모든 외적인 것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인격에 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또 다른 방법으로 얻어진다. 여기에는 육체적인 도움이 개입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우리의 영도 직접 하나님의 영성으로 들어간다. 비슷한 방법 아니 훨씬 더 효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영적인 지식을 얻는다. 이 지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얼굴에 관한 상상을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한 개념, 하나님에 대한 과학적 지식 또는 그분에 관한 언급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과 직접 접촉하고 그분과 만나는 일이다. 삶 가운데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이 신비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성경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경은 계속 하나님과의 은밀한 동행, 그분의 장막 속에 거함, 그분과 함께 행하는 것 등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복음 자체는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생각으로 나타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더 고상한 지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어휘는 “하나님의 얼굴,,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모세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시 27:8 )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음은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알수 있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에게 가까이 하지 않고서 그의 인격을 알고 우리 자신을 그 앞에 나타내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그를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발견하기까 지는 쉴 수 없다는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마침내 하나님을 발견한 후에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고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을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시며 자신은 은혜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감격스러운 깨달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은혜가 드러난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