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12장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좇아 인간을 지으심

새벽지기1 2021. 8. 16. 07:19

모든 참된 종교, 진실한 신앙심, 실제적 경건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여러분은 젖을 먹는 어린 시절을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으며 생활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여러분이 하나님 날개 아래 거하기까지는, 하나님께 부탁하고 그분의 계명대로 걷는다 해서 그것 자체로 여러분이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경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감추어진 모든 분량만큼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보다 외형적인 종교 형식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이 세상에서는 외형적인 형식이 가장 잘 갖춰질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은 하늘나라에서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현재 살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속력을 발휘하며 사회의 타락을 예방해준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마침내 외적인 형태로 자라나서,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위엄의 빛을 받고 꽃이 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기를 쬐고 자라며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목을 축인다. 이리하여 마침내 사람이 자기 형제에 대해서 잘 알듯이 하나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잘 알게 되며 주의 장막 안에 그 영혼이 거하게 되고 그의 심령 성전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외형적 종교 형식은 변할 수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함없이 지속되며, 당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약해지지 않고 소생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와 여러분의 영혼의 복된 교제이다. 그래서 밤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잠자고 이른 섀벽에 다시 일어나서, 여러분의 선하신 목자께서 이 땅 위에서의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모돈 동안 당신을 인도해 주시는 대로 그 분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오직 여기에만 더 친밀한 성도들 간의 교제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들과 여러분 자신은 신앙 안에서 하나이며, 똑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 그들과 더불어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며 그분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게 된다. 그러나 영원하신 빛 되시는 하나님의 궁전으로 향하는 위대한 여행을 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자신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누면서 산다는 것을 드러내는 동반자들을 선택하여 동행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창조되었음을 환기시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참된 신앙, 즉 진실된 경건의 가능성은 단지 유일하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과 전능하신 하나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여러분이 죄 중에 잉태되었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 진리를 절대로 변경하지 않는다. 회개하여 섀 생명을 얻지 않고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중생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 당시의 본래 여러분의 특성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여기서 우상들에 대한 조롱이 나왔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시 115: 5-9). 

 

그러나 지금은 그 같은 표현이 우리에게 적합지 못한 것이다. 현대의 이교도는 휴머니티를 표방하고, 예술에 열성을 보이며, 고상한 삶의 형식에 대한 사랑과 충동을 느끼거나, 감각적인 쾌락과 부를 추구하거나 정열적인 자국을 좇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진실하다고 하는 신자들도 간혹 이 추세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너무 큰 비중으로 인격적인 요소를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에 힘과 능력을 준, 인격적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깊고 인격적인 교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한 채, 사랑과 은혜, 평화와 더 높은 선에 대한 아름다운 이상들에 폭 젖어 있다. 

 

물론 사랑과 자비에 관한 불멸의 이상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또는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 대신에, 사람이 스스로 사랑의 이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이상으로 하여 (하나님을 그것 뒤로 감추어 버리고) 자신들이 고안해 낸 것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께 밀접하여 적용시켜 보면, 여러분은 마찬가지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어떤 우상의 형상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 자신의 독생자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셨다. 이로써 막연한 이상은 저지 당하고, 이상적인 것은 이면으로 물러가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앞에, 명백하고 뚜렷한 빛 가운데 서 계신 것이다. 이 큰 차이에서 종교적 열정이 일어나게 되어 그것에 의해서 기독교는 세계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름다운 이상들에 대한 열망이었으나 사도들에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나타난 모습인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격 자체인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의 결속으로서 그 속에 능력의 비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랑이었으며, 그것에 의해서 그 시대의 세상은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교가 무너지게 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도마가 예수 앞에 무릎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능력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그 점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실되어 가고 있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여기는 감각주의에 의해 약화되었으며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잊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분의 주재되심이 모호해졌다. 그리고 요사이는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저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것들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에 대한 사랑은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ideal)에 대한 찬탄은 믿음을 파괴한다. 아삽의 시(詩)에서 주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탄 하신다.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81:11). 

 

그 말씀을 인격적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나의 피조물을 사랑하며 내가 만든 세상을 즐긴다. 내가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비치게 하기 위해 만든 지혜에 대해 극구 찬양하며, 내가 그들의 마음에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만든 사랑과 자비와 감정에 폭 젖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저버리고 나를 무시하며 나에 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바치지 않고 나와 교제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들은 도무지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인격적인 담화가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즉 사람들은 내가 만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나 나를 전혀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 때때로 그와 같은 불평을 하게 된다. 즉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소유물을 즐기며 만족해 한다. 여러분의 이념을 존중히 여기며, 여러분의 정원에서 따낸 꽃들로 몸을 치장하고 심지어는 여러분이 행하는 일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여러분과 인격적인 사뀜은 갖지 않으며 그의 마음에는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흔적이 없으며 여러분과 공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여러분에 대해서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 말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면 여러분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될 때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극구 찬사를 보내며 존경하며 업적들에 대해서는 칭송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당신에 대해서 인격적인 사랑을 줄만한 사람은 못된다고 평가해 버리는것이다. 

 

그러나 물론 하나님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어서 인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존경받으실 만하며 지극히 선하시며 사랑 자체가 되시며 모든 면에서 사랑받으실 만하며 영원히 사모함을 받으실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은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라는 한탄을 하게 만들었을 때에, 그것은 우리의 심령, 믿음에 대한 날카로운 한탄이신 것이다. 그것은 큰 오해에서 야기되는 심각한 감정을 표현한다. "나는 그들이 사모해야만 하는 유일한 분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전혀 나에 대해서 생각하며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마음과 뜻을 다해 내게 나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하나님인 나는 그들이 사랑하는 유일한, 강력한 사랑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피상성, 막연함, 비실제성, 신앙에 대해 사라져가고 약화되어지는 개념, 심령의 실제적인 신실함 즉 요약해서 우리의 신앙 열정의 결핍, 꺼져가는 신앙 열기, 거룩한 신비주의의 동결에서 표현되는 믿음의 퇴보에 대한 탄식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잘못이다.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기의 능력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신뢰하기 않는데서 말미 암는 오류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우리의 시대적인 악이기도 하다. 그것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치게 되는 전염병이며, 우리의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배교 행위를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반드시 제지되어야만 한다. 우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 우리가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냐눌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환경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서 막연한 이상들을 신봉하는 모든 잘못된 신앙을 격퇴하고 그 대신에 살아계신 하냐님에 대한 인격적 사랑을 대신 채워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고 지칠 줄 모르는 충성으로 설교와 신앙에 관한 저술,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간구를 함으로써 이 싸움에서 이겨 우리의 개인적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다시 역사하게끔 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싸움이 이 세상에서도 치루어져서, 우상 숭배가 사라져 환상에서 실제로, 이념에서 본질로, 막연한 종교에서 유일하신 대상인 하나님께의 경배로, 추상적인 것에 빠지는데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였던 살아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어야만 한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