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표상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날개를 가진 피조물들을 볼 때에 저절로 그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 주고 계시며, 그런 표현에 익숙해진 것이고 모든 헌신적인 신자는 곧 이 이러한 비유가 자신의 마음을 감싸주며 정신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아주 쉽게 이해한다. 병아리를 품고 있는 암탉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비유이다. 그 비유는 모든 사람을 그 모습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으로 감동시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단지 그러한 비유에 감탄하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비유는 보호와 사랑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과 보호는 모으는 목적이 있는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병아리들이 어미닭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해로운 새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히 피하려면 암탉에게 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본능적으로 병아리들은 어미닭 바로 곁에 숨게끔 되어 있으며 그들은 오직 어미닭의 모습이 보이는 아주 가까운 곳, 그들을 껴안아 주고 품어 주기 위해 펼쳐진 두 날개 아래서만 안식과 보호를 얻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 인상적인 주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비유에서 구체화되고, 따라서 그것에 의해 설명된다. 시편 91편에 나오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는 구절을 읽을 때에 우리는 똑같은 비유적 표현을 보게 된다. 시편 기자가 다른 곳에 기록한 것을 발췌해 보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 6 1:4).
언약궤의 속죄소를 덮는 그룹의 날개들에 의하여 표현되었던 것도 똑같은 생각이다. 이제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새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두 날개 아래에 새끼를 모으며 날개로 새끼들을 품어 주고 꼭 껴안아 준다. 이렇게 풍부한 연상을 시키는 표현은 우리의 영혼이 전능하신 주의 그늘 아래에서 안식을 구하며 그분의 날개 속에 숨을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상상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이나 땅 위에 기어다니거나 어슬렁 걸어 다니는 것이나 네발 가진 동물들에서 모방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땅 위를 날아다닐 수 있는 것 즉 우리 인간과 하늘 사이에서 사는 날개 달린 피조물들로부터인 것이다.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은 스랍들로서 날개를 달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 성경에서 인자이신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묘사할 때에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땅에 사는 영혼들의 은밀한 기도 제목은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를 가졌으면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창조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분에 맞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의 사실들을 호소한다. 즉 친절하고 아주 신비적인 종교를 표현하기 위해서, 날개 가진 동물 이란 상징으로서 모범적인 예가 되는데, 그 대담한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 가까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눈으로 보고 직접 느낄 수 있게끔 해 준다.
그러나 이 상징주의가 너무 극단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물질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병폐적 신비주의의 위험에 대해 경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순전히 영적인 방법 이외에 그분과 만나고 교제하고 사귀려 하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과장된 상징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나 귀금속으로 물질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게 함으로, 또는 사람을 범신론적 구덩이에 빠뜨려 영과 물체를 혼합시켜 마침내 지나친 정욕에 빠져,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며 그 영혼을 질식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우상 숭배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순전히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아무리 필요하다 할지라도, 영적인 것이 상상적인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그러한 잘못으로 말미암아 시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는 단지 우리 눈앞에 있는 것,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 우리 위에 있는 푸른 하늘, 힘을 가진 우리의 육체들보다 이 모든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형태와 구체적인 모습과 물질을 가지고 있으며, 만져 볼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우리가 자신의 영 안에서 이룩하는 것이 이에 첨가되는데 이것은 실재성이 없는 우리 사고세계의 추상적인 부분이다. 이 비현실적 세계의 중심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단지 우리의 생각, 정신 그리고 이념 속에만 존재 하시는 어떤 하나님, 그분과의 교제는 오로지 우리 생각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위의 경우에는 심령의 신비주의가 전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다(시 86:11). 하나님과 은밀한 동행을 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생각 밖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존재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자부심이 강한 영혼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나 그분의 장막 안에 거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심오한 영적 생활의 예를 들어서 시편 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생애는 이러한 위험을 반박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나온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재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의 두 팔로 안아주시며, 자신들의 골수에서 그 분의 거룩한 불빛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을 느꼈던 하나님을 말이다. 그들이 그분의 날개 밑에 숨을 수 있고, 밤을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서 지낼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분과 더불어서 평화와 안식과 영원의 즐거움을 누렸던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 엄청난 마음의 축복을 분석할 수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것을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 축복을 소유하고서 여러분은 그 축복을 놓치지 않고 또 방해받지 않게끔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분석하거나 상세히 비평하거나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 자신의 비평적인 판단의 쐐기를 박는 격이 되어 여러분을 포근하게 해주는 불꽃을 식혀 버리게 한다.
마음에 큰 축복을 얻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의 자부심이 스스로를 속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교만한 자부심은 모든 신앙의 뿌리를 갑아먹는 근류병(根瑠病)이다. 우리 보잘것 없는 자아가 위대한 인물이 되고 그의 마음이 모든 것을 이해하며 그의 돈으로 만물을 지배하며 그의 권력으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려는 것이 이 조그마하고 무의미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헛된 꿈인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분 자신의 자아는 작은 성전 안에 작은 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는 죄스럽게 하나님과 고립된 상태에 빠진다. 물론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죽을 정도로 차게 되다가 마침내 얼어 버린다. 그때에 밤이 다 지나기 까지 하나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무력하며 버림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여러분의 동료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 여러분 자신의 믿음의 지주이고 다른 사람들의 용기가 여러분의 겁 많음을 부끄럽게 하며, 또 다른 사람의 모범이 여러분 자신의 장점을 두드러지게 할 수는 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삶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집단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여러분이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죄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잘못 된 성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분을 의지하도록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인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인간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구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얻은 도움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우리 자신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힘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만 한다. 그러면 마침내 모든 인간의 도움이 우리를 패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영원불변 하신 하나님이시며 늘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계속해서 허리를 구부리고 부리와 가지, 즉 바로 그러한 행동 속에 원조와 도움이 있는가, 그 속에 자신을 위한 구원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뽑아낸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굳건한 신앙 위에 서게 된다. 여러분에게 잠시만 허용된 이러한 의심의 기간 동안 여러분은 전적으로 용기를 잃게 된다. 그때에 여러분은 마치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미닭이 보이지 않자 힘이 쭉 빠져 이리저리로 뛰어다니는 병아리와 같다. 그때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가 내려와 그 엄마를 찾아 헤매는 새끼를 채어가 버린다. 그때에 고상한 신앙의 확신은 모두 사라진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인식이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여러분을 인도하셨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도 사라져 버린다. 그때에 여러분은 완전히 기력을 잃게 된다 마음속의 예언은 침묵을 지키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동행 보다는 사탄과 더 가까운 교제를 나누게 된다. 시편 기자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그늘에서 쉬는 것을 찬양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전능하산 분의 그늘에 피하는 것에 주의해 보라. 반드시 이것이 덧붙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미닭이 힘 없는 병아리를 구해내기 위해서 매가 있는 곳까지 나르거나 아니면 뒤쫓아 가서라도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상징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아버지 가슴 위에서 쉰다는 것이 전혀 무익한 것이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쉬기는 하나 그분을 의뢰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날개 속에 숨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힘이 센 어떤 것이 그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러분을 채어갈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을 때에, 여러분이 그분께로 날아가면 불신앙은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에게서 안식처를 찾은 후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불신앙을 품고 다니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지켜 주시는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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