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12장에서도 홉스는 이 호기심이 인간 특유의 성질이라 하고, 이 성질로부터 세가지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말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원인이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같은 원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것들인데, 이 중 앞의 두가지 호기심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에 올 사건에 대한 평가인데, 그것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은 바로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원인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며, 이 감정은 항상 사람들을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 영원한 공포는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고대의 시인들이 말하듯이 신은 인간의 공포심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12장). 여기서 홉스가 말하는 고대의 시인들이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6?~55?)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우주의 본질에 관하여』 (De rerum natura)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에 있는 이 두려움과 어둠은 태양 빛으로도 흩어지게 할 수 없다. 모든 유한한 생명이 이 두려움에 붙들려 있는 이유는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알 수 없고, 그 일들을 모두 신의 의지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31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일이 비단 물리적인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이나 유령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이 초자연적이라고 믿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정신적인 세계도 지배당한다. 홉스는 유령이 있다는 생각, 일차적 원인인 신 이외에 다른 이차적 원인들에 대한 무지, 두려운 대상에 대한 숭배, 그리고 우연히 생긴 일을 예언으로 간주하는 태도’ 등 네가지를 종교의 씨앗으로 보았다. 이 씨앗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네가지 종교의 씨앗들에는 ‘무지’라는 공통의 형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홉스는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여러 신들에 대해 분석하면서 그런 신앙들이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유령이 있다는 생각도 무지의 산물이며, 이차적 원인들에 대한 무지도 과학적 지식의 결여에서 오는 결과다. 이방 종교의 창시자, 입법자 들이 사람들을 쉽게 복종시키고 지배하기 위해 흔히 사용 하는 방법인 우상승배와 거짓 계시 등이 모두 인간의 무지를 악용하는 사례들이라는 것이 홉스의 지적이다.
『리바이어던』에서 내리고 있는 정의가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주장이라면, 『인간론』에서 내리는 정의는 『리바이어던』 출판 이후 홉스에게 가해진 여러 차원의 공격에 대해 보수 신학의 관점을 반영한 방어적 답변의 성격이 강한 정의라 할 수 있다. 또 전자가 정통 종교와 미신을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것인가를 보여 준다면, 후자는 정통 종교가 갖추어야 할 두가지 요소, 즉 신앙과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와 미신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신앙과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 공적으로 인정되면 종교가 되고 인정되지 않으면 미신이 된다'거나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경배하는 것은 종교가 되고 다른 사람이 두려워 경배하는 것은 미신이라 부른다’는 홉스의 진술은 당시 신학자들과 교회로부터 비난받기 쉬운 너무 느슨한 기준처럼 보인다. 이렇게 종교와 미신의 차이점을 단지 믿는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에 둔 이유와 내적 신앙과 외적 예배 형식만을 종교의 기본 요소로 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홉스의 전략이 숨어있다.
종파 분열(schism)로 인해 발생하는 종교전쟁 같은 갈등을 해소하고 마녀사냥 같은 이단논쟁의 소모전을 피하기 위한 홉스의 전략은 종교와 미신을 구별짓는 결정권이 국가의 공적 인정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독교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 세에 의해 공인되기 전까지는 이방 종교의 하나이자 미신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홉스는 환기하고 있다. 또 신앙의 조건을 진실성과 경건함에 두고 예배 형식의 정당성을 국가의 법 테두리 안에 둠으로써 종교의 토대를 개인이나 소수집단의 의견(이는 미신으로 흐르기 쉽다)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법 위에 두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는 철학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법이 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한 그가 어떤 종파에 속하건 모두 기독교인이라 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소한 성서 해석의 차이와 예배 형식의 차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종교적 분파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바람 부는 것이 평범한 기후 현상으로 되어 있는 우리와 같은 북반구 땅에서는 이 말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들리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되어진 지방에서는 날씨가 보다 온화하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서 바람은 뭔가 거룩한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 철학은 아직까지 대기의 흐름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하늘의 시커먼 구름과 숲 전체를 요동시키는 요란한 굉음으로 인해, 그 무시무시한 폭풍은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것은 신비스럽고도 설명할 수 없는 강도로 오는데, 느껴지 기는 하나 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며 소리는 들리나 눈으로 보지는 못하며 강력하면서도 만져서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서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밀어 제친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엄을 가지고 광풍 속에서 인간을 보시듯, 하나님께서 아무런 중간 매체 없이 우리 인간에게 직접 행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이 바람이 지닌 이러한 상징은 성전이 지닌 상징과 반대를 이룬다. 성전은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며 우리 마음속에 자신의 처소를 정하시고 깊은 곳에서 우리를 소생시키시며 꾸짖거나 위로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전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곳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친밀성, 유연성 그리고 가까움을 나타낸다. 그리고 비록 성전에는 휘장이 있고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때때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사랑의 소생함은 결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늘 우리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이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늘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인격적으로 그의 자녀와 함께 계신다. 바람이 의미하는 상징은 이와 대조적이다. 세미한 공기의 움직임으로서의 바람이 외부로부터 부드럽게 낙원으로 불어 왔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항상 외부로 부터 접근한다. 바람은 이처럼 처음에는 전혀 바람이 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온다. 여기서 그 차이가 나타난다. 바람에 의해 상정되듯이, 사람이 처음에는 하나님 없이 산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기를 진동하시며 활동을 전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가셔서 그를 일깨워 주시고 마침내 그를 온전히 채워 주신다. 바람이 지닌 상징과 성전이 지닌 상징은 둘 다 필요하다. 우리 신자의 삶은 반드시 이 두 가지와 관계되어 있다. 이 양면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만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생명력이 넘치는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여러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존귀하게 우리 위에 계신 존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분은 하늘에 자신의 보좌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그의 발동상인 이 땅 위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지닌 상징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나타나 있다. 바람은 구름으로부터 우리를 치며 우리는 때때로 그것이 우리 뼈의 골수에 통렬한 아픔을 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자녀사이에는 또한 거리를 초월한 자유로운 교제가 이루어지며 이로써 모든 불화를 제거하여 하나가 되어 친밀하게끔 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성전이 지닌 상징속에 나타난다. |
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 자신은 우리 영혼의 내적 생명 속에 내주하신다. 성전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의 엄청난 부를 나타낸다. 사나운 바람은 주님의 위엄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완벽하게 작용할 때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아주 은혜스러운 경배와 동시에,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에 대한 아주 복스러운 즐거움, 이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영혼의 내적인 생명의 추가 늘 앞뒤로 움직이게끔 하라.
여러분 자신이 한동안 신비주의의 달콤함에 유혹되어 너무나 경박하고 너무나 쉽사리 그것에 빠져 있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는 어슴푸레한 교제를 맺음으로 그분의 위엄에 대해 깊은 존경을 하지 못했다고 느껴지면 여러분은 머뭇거리지 말고 일시에 여러분이 빠지기 쉬운 이러한 오류를 떨쳐 버리라. 그러면 여러분 존재가 얼마나 작고 무가치한가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주 여호와의 위대하심이 다시금 당당한 자태를 가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반면, 여러분이 주님의 위엄에 강한 인상을 받아 위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잘 알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서 마음으로 자신은 너무 미천한 존재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 처럼 느껴지고 영혼 속에서 더 친밀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사라질 정도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면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힘써 노력하여 여러분의 굳어버린 심령을 영원하신 사랑의 불빛 아래로 가져와야만 한다. 그러면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의 진동이 너무 빠르지 않게 지속된다면 유익이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의 친분과 ‘‘하늘에 계신 분’’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의 매일의 내적인 삶의 체험에서 서로 잘 조화되어 어울어 질 때에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생을 단지 꿈꾸듯이 보내며 되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존재를 약화시키고 둔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룰 수 없고 자신의 경건한 삶의 신선함을 포기하게 된다.
건전한 마음 상태와 더불어서 계속적이고 정상적인 교대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신 후에 계속적으로 신실하게 인도하셔서 자격 있는 그분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한 사역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한 사역과 더불어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며 거룩하신 사랑을 느낌으로써 내적으로 그분과 친밀하계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우리 가까이에도 계시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바람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여러분은 어떤 때는 무의미하게 자신의 인생을 보낸다. 또 어떤 때는 매일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발견한다. 여러분의 심령에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매사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들과 순간들 속에서 전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때때로 아주 사소한 일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여러분의 주의를 집중시켜서 사고하게끔 만들며 오랫동안 많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이가 여러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친구가 여러분의 귀에 속삭이는 것 자체가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들려온다고 깨달아질 때가 있다. 여러분이 듣는 모든 소리, 모든 소식, 단조로운 날에 색채와 가락을 넣어 주는 모든 사건들이 이 특별한 날을 위해서 ‘‘공기가 움직이므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려 올 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우리의 관심을 모으며 또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설득하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를 진동시키며 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을 스쳐 지나가 여러분을 일깨우지 않은 나날은 헛된 것이다.
부드러운 공기의 진동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접근하셔서, 여러분이 산선한 바람과 더불어 다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맛보며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그런 열매를 맺는 나날은 복된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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