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요한복음 21:15~17)

새벽지기1 2020. 6. 18. 06:57

부활절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지구의 종말, 그 핵심에 영원히 불타오르는 선교와 복음 전도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가 주님에게 드릴 수 있는 우리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가 성령과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지만 동시에 부활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기둥이 기독교의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나 어떤 교파든지 십자가와 부활과 상관없는 교회나 교파는 잘못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상관없다면 이단이거나 이상한 교회일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속에는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험한 십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보혈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부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다시피 돈은 우리에게 순간적인 쾌락은 주어도 영원한 행복은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부활입니다. 부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진짜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어제 고난주간 특별 새벽집회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물과 피로 봤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그 물과 피가 성령과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존경받는 유대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유대 공회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를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 죄를 씻는 보혈이었구나. 그것이 우리를 부활시키고 새롭게 하는 성령이셨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담대히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임을 숨겨오다가 자신을 드러낸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조의 근원은 빛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이 빛이었습니다. 빛과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창 1:2).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 천지 창조를 실제로 행위로 옮기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이 가장 먼저 붙잡은 단어가 빛이었습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창 1:3). 그리고 천지 창조가 시작됩니다. 창조의 근원은 빛입니다. 어둠을 밝히고, 죽음을 생명으로 만들고, 물질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게 한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창조되면서 아름다운 천지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의 수없이 많은 구절에서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모든 예언서, 율법서, 시편, 역사서 속에 가려진 채 계셨습니다. 신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냥 보통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메시아의 실체를 보기 시작합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교회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 33년 동안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것까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종말에 심판자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그림은 없습니다. 마음속에 ‘아, 이 분이 오신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약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메시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그림이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털이 깎이고 죽음 당하는 양같이 예수님은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고 그냥 죽음 당하시고 고통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능력이 있는 분입니까? 그가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냥 그분께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때문에 피를 흘리시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 성취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당시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도 마음속에 부활이라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돌무덤에 갇혀 있던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킵니다(요 11:44).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은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한 번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가 또 죽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보는 부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죽었고 영원히 사셨습니다. 다시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율법을 성취하시고, 메시아를 성취하시고, 이스라엘의 희망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메시아를 설명해야 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친숙한 이름이 아브라함과 다윗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마 1:1). 거기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막 10:45).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방인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돼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에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초기 서신과 데살로니가서는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 전후서와 로마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최고이신 예수 그리스도, 목회서신인 데살로니가서, 디도서, 디모데 전후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야고보서는 몽학 선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메시아 예수’

 

계시록은 1장부터 22장까지 매장마다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시록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신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단에서 계시록을 많이 오용합니다. 여러분, 계시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어떻게 오시는가? 종말이 오면 인류의 종말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종말에 심판자로서 면류관을 쓰시고 영광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는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한 것이 계시록입니다. 1장에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일곱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상의 교회를 감독하시고 관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4장, 5장에는 땅의 예수가 아니라 하늘보좌 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6장, 7장은 역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부터 11장까지에는 우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돼 있습니다. 12장, 13장에는 마귀를 정복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돼 있습니다. 14장, 15장에는 일찍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시온산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5장부터 19장까지는 종말에 도적같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장, 20장에는 승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22장에는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돼 있습니다. 22장 6절부터 22절까지는 드디어 주님이 재림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봤을 때 흥분하고 찬양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바로 승천하지 않고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  

 

사랑은 회복의 시작

 

오늘 본문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랑스러운 눈으로 베드로를 보고 있고 베드로는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목사라고 하면서, 장로라고 하면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사실 주님을 배반하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외의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이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도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마음을 좀 정리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십니다.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도 지금 동시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확실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완전했고 배신을 했고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마음 깊은 구석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던집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두 번째에는 아가페적인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합니다. 세 번째 물으니까 당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17절)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을 사랑할 자격도 없고, 내가 한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었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한 베드로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 떼를 쳐라, 내 양 떼를 먹이라.”

 

주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 순종해야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중해야 될 것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지구의 종말입니다. 이 지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도시 문명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감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눈앞의 현실만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20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일곱 금촛대가 보였고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분이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타오르는 불과 같고 그분의 발들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 같고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는 그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왔고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 나는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자기의 오른손을 내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으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 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일들과 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것이니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이것이 재림할 때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33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모습 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그래서 목숨 걸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숨 걸고 했는데, 요즘은 ‘누군가 가겠지, 누군가 하겠지’라는 생각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사람들이 많습니다. 올해 경기도 양지에 선교센터를 완공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다시 모든 온누리 성도들이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태어난 교회입니다. 그것이 온누리교회의 비전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지구의 종말, 그 핵심에 영원히 불타오르는 선교와 복음 전도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가 주님에게 드릴 수 있는 우리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