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예수의 흔적! (갈6:12-18절)

새벽지기1 2019. 6. 16. 07:07


예수의 흔적!

(6:12-18)


본문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서론


오래 전에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범인 이성재가 엄마를 죽일 때 손톱 조각이 떨어졌는데, 죽어가던 엄마가 아들의 범행을 숨겨주려고 손톱을 먹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어머니 시체를 검안하던 중 어머니 목에서 발결 된 손톱으로 인해 범인 아들이 체포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톱은 바로 범인의 '흔적'이었습니다.

오늘 17절에도 흔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서 흔적(, 스티그마)’이라는 단어는 원래 헬라어 스티조’-인두로 종의 몸에 문신을 새겨 표시하는 것-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문에서는 바울이 주님 때문에 당한 고난의 흔적이나 상처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이 되는 앞 문장을 다시 읽겠습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 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비본질적인 것-헌금/봉사/금식등)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본질)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라고 여겼으며,

할례자체가 신앙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례자체가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례'세례는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골로새서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갈라디아서이 기록목적은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빠져 참 구원과 할례를 모르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바른 신앙을 가르치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할례를

-크리스찬들이 박해를 피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으며(12)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용했습니다(13).

하지만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할례문제로 복음을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할례보다 훨씬 더 영적이고 실효적인 할례 즉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왜 중요할까요?

고린도전서 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례십자가의 흔적을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한 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속량의 흔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께서는 2천년 전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속량물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일이 실감이 나십니까? 저는 대학 때 선후배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 보문산 중턱에 있는 우리들만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이 생각나서 펑펑 울면서 기도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이 났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것은 제게 큰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얼마 후 있었던 일입니다.(20:25-29)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께서 보지 않고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 아십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고도 예수님을 메시야 인줄 몰랐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인데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대인 처럼 (구약)성경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각자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지도 못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흔적이라는 단어를 생각 할 때마다 전에 읽었던 감동적인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우리 엄마는 빨래집게 공장에 다니신다.

매일 산더미만큼의 일을 하셔서 집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나가신다.

늘 열심인 우리 엄마는 한쪽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다.

정말 보기에도 끔찍한 그런 흉터이다.

어쩌다가 다쳤냐고 물을 때면 엄마는 그저 씩 웃으시기만 하신다..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적 이미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난 집이라 하기에도 뭐한 조그마한 반 지하 방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난 아빠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해 결혼 하신게 분명 하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얼굴은 화상흉터 때문에 끔찍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정말 부드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길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지야!” 뒤를 돌아보니 엄마였다.

헐렁헐렁하고 단정하지 않은 옷차림에 요즘은 팔지도 않는 그런 낡은 슬리퍼를 신고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화상흉터가 있는 얼굴과 팔

친구들은 나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왔다..

, 이선지. 누구야?”

…….. …… 우리 집…… 파출부……

그 순간 엄마 얼굴은 흑색으로 변했고 잠시 당황하던 엄마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다.

…………….

왜 내가 엄마를 파출부라고 했을까? 왜 당당하게 우리 엄마라고 말 못했을 까?

그 날, 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보통 때처럼 방에 있다가 날 보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지 왔니? ” 하고 말했다..

선지야. 엄마가 선지한테 할 얘기가 있거든좀 앉아봐.” “………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렇고 보니 이제까지 난 아빠가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엄마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예전에. 선지가 아직 한 살 이였을 때 말야집에 큰 불이 났었어

소방대원들이 엄마와 아빠를 구출하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선지 니가아직 집 안에 있는거야……..”

아빠는 가지 말라는 소방대원들의 말도 안 듣고 불의 휩싸여 있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시간이 조금 흘렀단다그 때 엄마는 정말 돌 것만 같았단다.

그래서 미친듯이 엄마도 집으로 들어갔지..

집 안에서는..니 아빠가널 안고 방에 있는거야

문이 불에 휩싸여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던거지

그 와중에서도 아빠는 니가 다칠까봐..널 꼭 안아주고 있었단다..”

………. 그래서……그래서, 엄마………?..”

엄마를 본 아빠는널 내게 건네 줬단다너만이라도 살려라는 뜻이였지……

엄마의 맑은 눈에 눈물들이 고이기 시작했고 엄마의 고운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는 널 끌어안고 집을 빠져 나왔단다..”

엄마의 이 화상흉터가 어떻게 생긴지 궁금하댔지.?

이건. 널 안고 집을 빠져 나올 때 불기둥이 널 덥치려하길래

널 보호한다고 안았다가 생긴 흉터야..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나 하나를 위해서..

엄마와 아빠가 치르신 너무 큰 희생에 난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훌륭하신 우리 엄마를 난 부끄럽다고 친구들에게 파출부라고 속이기나 하고

엄마의 꿈은 성악가 였다고 한다

그러나 날 지키기 위해 얻은 흉터 때문에 엄마는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제가 전에 캠퍼스 사역 시작 할 때 캠퍼스 나가면서 들었던 찬송 가사가 있습니다.

찬송은 윤형주 장로의 복음성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 가신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서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음성

오 나의 주님 용서 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 셨던 길>

특히 2절 가사입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자국

손과 발목 다 찢기신 지치신 주님의 모습

오 나의 주님 용서 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 셨던 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자국

손과 발목 다 찢기신 지치신 주님의 모습...

바로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주님의 속량의 흔적입니다.

이 대속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둘째,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준 복음의 흔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설립했던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로부터 사도권 시비가 일었을 때

복음과 예수를 위하여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편지했습니다.(고전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는 온통 상처 투성이 즉, 복음의 흔적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처는 몸에 만 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글은 좀 쓰는 것 같은에 말은 잘 못한다(고후11:6)’

외모(안질 추정)가 시원치 않다(고후12:7)’

바울은 이런 비아냥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성도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을 내기는 하지만 절대 뒤 끝이 없습니다.”

그 집사의 변명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은 뛰 끝이 없지만 그 뒤끝은 상대방에게 상처로 남습니다.”

사도 바울이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위한 상처(흔적)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로마 여행해본 사람 있지요?

로마 여행하게 되면 볼거리 정말 많습니다.

먼저 팔라티노 언덕에 오르면 천년 로마의 흥망성쇠를 볼 수 있습니다. 개선문, 원로원, 공회당, 그리고 유대인 노예들의 한이 서린 콜롯세움이 보입니다. 바티칸으로 가면 하늘을 찌르는 베드로 성당의 돔,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베드로 광장,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으로 가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저 아래 남쪽으로 가면 세계 3대 미항 나폴리가 있고 조금만 더 가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저절로 각성하게 하는 폼페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수 많은 시인들의 감성을 자극했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을 자랑하는 소렌토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는 그 자체가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로마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곳은 폼페이카타콤입니다.

그 중에 카타콤은 원래 지하 묘실을 일컸는 말로 지하 10-15m깊이에 펼쳐진 거대한 도십입니다. 대체로 폭 1m미만 높이 2m정도의 통행로 연결되어 있고 계단이 즐비한 곳으로 곳곳에 넓은 방처럼 묘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카타콤은 안내원이 없이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길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대부분의 카타콤은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 시기 교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카타콤은 로마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신앙의 흔적입니다.


<바보 같은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소문난 명망가나 의료계의 리더도 아니었습니다. 의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33세의 젊은 나이로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조문객 4000여명이 줄을 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병원 매점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부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노점상 할머니까지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가 생전에 피붙이처럼 돌봤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의 서문입니다.

그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내 아이디인 스티그마(, 흔적) 단어는

교회 대학부 성경공부 팀의 이름인 스티그마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갈라디아서 617절 말씀이다. 스티그마는 내게 무척 각별했다.

또한 나는 교회 안의 성경공부 팀 '스티그마'를 통해

내 신앙과 삶의 본이 될 선배들을 만났고 모태신앙의 껍질을 벗었다.

선배들이 내게 보여준 헌신은 내게 큰 충격이자 도전이었다.

그들은 매주 성경공부 교재를 직접 만들어왔고,

직장인이면서도 성경공부에 불참한 조원들을 위해 평일 보강을 해주었다.

깊이 있는 말씀을 위해 '스티그마'가 아닌 '숙제 그만'이란 우스갯소리까지 들어가며

많은 과제를 내주고, 자신들도 철저하게 준비하던 선배들.

부족하기 짝이 없는 후배를 위해 눈높이를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무자비(?)하게 밥을 사주며 집으로 초대하던 선배들.

그 선배들 밑에서 나는 난공불락으로만 보이던 믿음의 요새들이

사실 도전해 볼만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린 믿은 자의 모임 안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 일 수 있지만,

바깥에 나가면 도움이 필요한 '작은 자'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바쁘고 악한' 종교인이 될 수도 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욥은 까닭 없이 사단에게 고난을 받아 온 가족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욥의 몸에 난 종기자국은 그의 신앙의 흔적입니다.

풀무 불은 다니엘의 세친구들의 신앙의 흔적입니다.

사자굴은 다니엘의 신앙의 흔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런 예수의 흔적은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을 통해 보여 지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위인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셋째,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흔적이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제가 단순한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성경을 보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성경에 손때가 묻어 있거나, 메모를 했거나, 밑줄 친 자국이 있다면, 여러분은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있다는 증거(흔적)입니다.

여럼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세례 받은 것이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나요?

혹시 예배드리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나요?

혹시 헌신 봉사하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몸에 십자가의 피가 묻어 있어야 그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나도 그 부활에 동참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예수님만이 오직 나의 주님이다.‘

이렇게 확신 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러시아를 공격하던 중 유능한 러시아 장교 한 사람을 생포했는데 나폴레옹은 그 장교가 욕심이 나서 를 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 러시아 장교는 회유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부하에게 인두를 가져다가 팔에 'N‘자를 새기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교가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말했습니다.

너는 영원히 나에게 속한 장교라는 뜻이다

그러자 그 장교는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을 잘라냈다고 합니다. 그 러시아 장교는 피가 흐르는 팔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러시아 황제의 흔적 외에 그 어떤 다른 흔적도 가질 수 없다

나는 영원한 짜르의 신하다!’

짜르는 러시아 황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내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오래 전 한 언론사 기자가 부산에 있는 한 절의 노승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 요즘 승려들을 보면 머리 깎은 것 외에는

나 같은 속세 대중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너와 내가 다른 것이 뭐냐?)

승려: 수행을 원만히 이룬 사람이면 성불(成佛)한 것이다.

하지만 수행 과정에 있으면 아직 '사람'이다.“

기자: 호텔에서 웃통 벗고 도박하던 승려들도 그런 과정에 있다고 봐줘야 하나?

승려; 수행 과정인데 아직 초월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

기자: 불교가 전체적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승려: 요즘 절간에도 놀고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인터뷰 내용을 다 옮기지는 않았지만 기자의 질문 하나가 나에게 찔림이 있었습니다.

'요즘 승려들을 보면 머리 깎은 것 외에는 나 같은 속세 대중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

이 말 때문입니다. 이 말이 내게 이렇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인들을 보면 예배드리는 것 외에 나 같은 속인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6:4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시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삶 가운데 나를 위해, 나 때문에 생긴 흔적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우리는 답변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 우리의 입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이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속량의 흔적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준 복음의 흔적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우리에게 어떤 예수의 흔적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가 반응할 차례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