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리적, 이론적인 부분(1~3장)과 실천적인 부분(4~6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첫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됨이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르심의 목적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였습니다. 또한 ‘합당하게 사십시오’라고 합니다. ‘합당하게’라는 말은 ‘딱 맞게’, ‘알맞게’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계획, 청사진, 그림, 목적에 알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3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됨입니다. 에베소서의 큰 주제도 이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처럼 거대한 대우주적 통일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그 때의 주제도 하나됨이었습니다(요 17:11).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은 개성도 없애고, 장점도 없애고, 특성도 없애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개성도, 실력도, 다양성도 살아있는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참 아름다운 세상이 나옵니다. 새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치고 땅에 있는 짐승들은 땅을 걸어가거나 뛰어갑니다. 그런데 서로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아담과 하와가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꽃도 나무도 제각기 다르지만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됨입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하나됨이 우리 가정, 교회, 민족 가운데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됨의 비결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아름다운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을까요? 하나됨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
첫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은 종들이 주인에게 굽신 거릴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인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기는커녕 비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주장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낫다. 잘했다’라고 하기 시작하면 하나됨이 회복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몇 가지 지수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능지수(IQ)로만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감성지수(EQ)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관계지수(RQ)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가, 얼마나 대인관계가 좋은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겸손이 하나됨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둘째, 온유입니다. 온유는 약자의 비굴이 아니라 강자의 부드러움입니다. 힘은 있지만 힘을 마음대로 쓰지 않고 통제하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말도, 글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말고 꼭 필요한 곳에 쓰기를 축원합니다. 거기에 하나됨의 비결이 있습니다.
셋째,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을 한 마디로 한다면 ‘성 내지 않고, 화 내지 않는다’입니다. 화를 내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천천히 하고, 화를 내는 것은 더 천천히 하십시오(약 1:18~19). 화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장군보다 낫습니다(잠 16:32). 이 말을 다르게 보면 ‘끝까지 기다려주라’는 것입니다. 기대를 꺾지 않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살아가시면서 ‘이것이 마지막이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못 참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화가 날 때 ‘한 번 더 참는다’라고 말하십시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화를 내시기보다 묵묵히 바라봐 주셨습니다. 사람은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때 바뀝니다.
넷째, 용납입니다.
용납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실수와 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하나됨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로 만드시는 성령님 과연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하나됨은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앞서 우리는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됨이다, 하나 되어 살아가는 방법은 결국은 사랑이다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3절에 보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님은 하나로 만드시고, 사탄은 깨어서 나눕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이 네 가지를 넣어서 하나됨을 깨뜨립니다.
첫째,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겠지 하는 교만입니다. 둘째, 인간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만입니다. 셋째, 아담이 리더의 역할을 소홀히 한 태만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오해입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이러한 방법으로 관계를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평생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됨을 이뤄놓으셨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하나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지배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뤄놓으신 하나됨을 지킬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힘써 지키라’는 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한번은 지킬 수 있겠지만 평생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 교회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왜 하나됨을 지켜야 할 까요? 4절~6절에서 그 근거와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같은 소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몸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주님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한 가족이기 때문에 하나 되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배를 탔습니다. 여러분, 물보다 진한 것은 피고, 피보다 진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얼굴 붉힐 일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천국에서 한 가족으로 만나서 이 땅의 일들을 생각하며 ‘그때는 미안했어’라고 말할 일을 많이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말 가운데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물을 칼로 베면 상처가 남지 않지만 부부에게는 상처가 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용납하고, 사랑하고, 베풀고, 칭찬하고, 기다려주고, 기대해주고, 서로 사랑하는 기억을 남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하게 온유하게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분 가정 가운데, 이 민족 가운데, 한국 교회 가운데 하나 됨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가능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환상적인 팀 워크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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