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게 살지 말라!
(마21:23-27-권위 논쟁)
▶본문
23.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해석과 설명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23절)
당시 예수님의 일정상 예루살렘 입성 3일차(화요일)사건이다.
일요일에는 예루살렘 입성이 있었고, 월요일에는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이 있었다.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공생애 마지막 가르치심을 주시고 있을 때를 말한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물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당신에게 주었느냐?”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을 했다.
즉, 네 권세의 출처가 어디냐?는 질문이다.
여기서 ‘이런 일’이란 예루살렘 첫날 성전 정결 사건등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들을 말한다.
이는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잡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2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 질문 즉, ‘당신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답하겠다.”는 것이다.
그 질문 내용이 25절이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5절)
이 질문은 종교지도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25절하반절과 26절에 그들이 빠진 상황이 그대로 설명되고 있다.
그들이 만일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고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요한의 사역의 핵심이 ‘예수가 메시야다’라는 사실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7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답변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그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면 당시 유대교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비열한 선택을 한 것이다.
▶교훈과 적용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예수의 이 질문에 대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대답이다.
하지만 정말 저들이 ‘세례요한의 사역의 권위’를 몰랐을까?
결코 아니다.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는 더욱 없었다.
만약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당시 유대교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열한 선택을 한 것이다.
여호사밧은 유대 제7대 왕이다.
그의 가장 큰 과오는 이스라엘왕 아합과 친하여 사돈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 아합왕을 만났다(왕상22장).
아합왕은 여호사밧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이니 우리가 그들을 쳐서 그곳을 되찾아 옵시다(왕상22:3)'
이 때 여호사밧은 이렇게 대답한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여쭤 봅시다!(5)’
이에 아합은 거짓 선지자를 불러 여호사밧 앞에서 의견을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6)’
여호사밧은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아 아합왕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더 없습니까?(7)’
아합왕은 대답하기를 한 사람이 있기는 한데 그는 내게 나쁜 일만 예언하는 자입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단호히 이렇게 말합니다.
‘왕은 그런 말씀 마소서!(8)’
‘no!’라고 말해야 할 때 단호히 ‘no!’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하지만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no!'라고 했어야 할 상황이 많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적이 적지 않다.
그래서 많이 부끄럽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yes’와 ‘no’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비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처럼 비열하게 살지 말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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