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4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한다.

새벽지기1 2018. 1. 30. 08:04


수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8가지 악행을 말했는데

폭음, 간음, 탐욕, 분노, 슬픔, 나태(마음의 걱정이나 악함), 자만 및 허영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태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역사를 통해, 과거를 통해 인간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게으름 또는 나태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나이만큼 계절의 변화를 맞이한다.

분명코 경험했다고 하지만 잊지버리고 만다.


잊는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잊지 않고 간직하려면 인간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노력해도 인간은 부지런해지지 않는다.

물론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자가 있다.

그것도 상대적이고 하는 수 없이 행하는 것이지 본성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절대적 부지런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본성적 게이름을 그대로 둘 순 없다.

여러 가지 고안을 통해 본성적 게으름과 싸우도록 한다.


먼저는 감성적으로 의지를 충동한다.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에 대한 강조점이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가장 저급한 것은 체벌이나 형벌이다.

고통과 공포를 통해 의지를 충동시켜 게으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감동이다.


감정 유입이 되면 인간은 하려든 의지를 접고 만다.

납치범이나 자살행위를 자행하는 자에게 감동적 메시지나 기억을  되살리면

자신의 행위를 이성적으로 되살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정상적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인 것이지만 어떤 경우엔 효과를 발하는 경우도 있다.


그 다음으로 이성적 충동이다.

합리적 사고를 통해 인간이 행동하도록 설득시킨다.

일관적이거나 논리적이면 인간은 설득 당한다.

설득되면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고 심리철학자들은 주장한다.

과연 인간이 그렇게 기계처럼 가능할까?

이따금 대화나 사고를 통해 의지의 변화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이것을 감히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것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낭패를 볼 것이다.
세상적 사고나 방법을 19세기 모더니즘에서 잘 나타났다.

인간이 무엇이든 사회나 인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가 프랑스에서 출발했다.

고무적인 것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무신론이 있다.

 하나님 없는 실증주의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이 만들어졌다. 하나님 없는 가운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런 방법이 통한다.

그런 제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움직이거나 활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은 전혀 다르다.

중생된 자의 활동은 인간적 고안물에 영향을 매우 조끔 받을 수 있지만 부팅시키는 것에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당분을 섭취하기 위해

초코릿이나 청량음료를 먹거나 마시게 되면 결국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만든 당분은 제한적일 뿐이다.


그 제한의 한계가 어디냐라는 것은 또 다른 범주에 해당된다.
신앙은 처음부터 이런 세상적 방법을 경멸했다.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언제든 제한적이기에 진정한 동기부여인 성령의 감동을 바란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를 통해서만 역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