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예배에 집중하기(5)

새벽지기1 2017. 4. 20. 07:34


예배에 집중하기(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종교행위를 예배라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놓는 예배가 무엇인지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런 신학 개념을 이해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무엇인가?


목사가 목사 가운을 입고 장로들이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는 기도를 드리고, 성가대가 ‘영광’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예배의 형식만으로는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적했듯이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장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묻자.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놓는 예배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영광’은 우리가 생산해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존재 방식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한다. 우리가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심연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존재 심연은 생명의 깊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생명의 깊이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명의 깊이를 마음대로 열거나 닫거나 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심연, 곧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광으로만 나타나신다. 그게 곧 계시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여는 게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만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예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생산능력, 업적을 최소화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우리의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만 하나님의 통치가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배는 인간의 능력을 무력화하는 종교행위이다. 우리의 찬송을 우리가 즐겁기 위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즐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부른다. 물론 구원받은 즐거움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런 찬송은 예배 찬송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흥찬송에 가깝다. 예배찬송은 일체의 인간적 업적, 감정, 희망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만 한다.


이게 어렵다.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접어두는 게 어렵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두 팔 벌리고 자신의 경건한 삶을 감사하며 기도한 반면에 세리는 자기의 모든 것을 무화했다. 바리새인은 단순히 종교적인 만족감에 심취했지만 세리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맡겼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두는 예배는 곧 계시 사건과 일치한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계시한다는 사실에 기독교 신학의 모든 것이 걸려 있듯이 하나님만이 스스로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오늘 예배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이것이 예배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 다음 기회에 더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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