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십자가 신앙

새벽지기1 2017. 4. 3. 07:03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까지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설화’에 해당된다. 이 수난설화의 정점은 십자가 처형이다. 예수님은 다음 목요일에 밤에 체포당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중심이다. 이미 신약성서가 구약에 근거해서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를 충실하게 해명하고 있으며, 2천년 신학의 역사도 역시 이런 작업에 충실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선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다. 죄는 반드시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죄가 용서받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장막이 갈라졌다는 보도가 바로 이런 신학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십자가론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내 질문은 다음과 두 가지이다. 첫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둘째, 인류를 구원하는데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만약 복음서를 진지한 자세로 읽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능한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왜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피하려고 했을까? 예수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억울하게 죽어야 할 경우에, 또는 국가와 어떤 이념을 위해서 죽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은 제법 있다. 더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대도 성서는 예수님의 그런 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속사정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만약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님이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려고 했다는 뜻은 아니다.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그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한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게 성서와 신학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이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우리는 이렇게 교리화한 가르침 이전에 십자가 처형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도그마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 혹은 개념을 심층적으로 풀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형해화의 길을 가기 때문에 비록 귀찮거나 불안하다고 하더라도 근본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야만 한다.


다시, 예수님이 반드시 십자가로 처형당해야만 인류가 구원받는 것일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사의 결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운명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된 것, 또는 그렇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역사를 그렇게 결정론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독교의 신앙을 강화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화할 수는 없다. 이미 신약성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당시에 무슨 의미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2천 년 전 그 당시에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다고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뜯어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몇 번 예고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진술을 훨씬 많은 역사비평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죽음을 의식하셨을 테지만 그런 구체적인 언급은 훨씬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까 접어두기로 하자.


예수님마저 십자가 처형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손상당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당시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즉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미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으로 지양된 이후에는 그 십자가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다. ‘불가역의 원리’라는 물리학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가 실행된 다음에는 그 이외의 구원의 길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어떤 마술적인 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 십자가는 예수라는 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결과이지 십자가가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를 단지 교리적으로만 안다면 십자가 사건은 독단적인 교리로 남거나 아니면 종교적 감상주의로 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가 가리키는 구원의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좀더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이 세상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한 인생의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가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제 인간의 성취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결코 십자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성취, 목회적인 성취도 결국 구원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목회에서 실패하는 목사야말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자기 성취에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구원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점에서 목회를 철저하게 패배해도 왜 괜찮은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주장은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별 볼일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위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 고백이다. 실패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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