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서론
샬롬! 오늘이 종강채플이네요.
기말고사 승리하셨습니까?
아직 기말고사 끝나지 않았는데 채플에 나온 지체들을 특별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아마 그래서 이 세상 호랑이들이 모두 가죽이 벗겨져 죽은지도 모릅니다.
농담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 중에 아주 몇 명만이 세상에 이름을 남김니다.
그 중에는 왕이나 유명한 정치가 군인 일부 부자등이 이름을 남깁니다.
하지만 이름을 남긴다고 모두가 다 영광스러운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한국 근대사에 대표적인 불명예스러운 이름은 ‘이완용’이 아닐까합니다.
역사상 잔인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당 고종의 아내였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부터 공포 정치를 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다음까지 포함하여 죽인 사람이
수백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23명이 자신의 가족 및 친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잔인한 인물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이세벨과 그 땅 아달야입니다.
아달랴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손자들을 모두 죽인 악녀였습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름으로 남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왔다 떠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1학기에 떠납니다.
그래서 2학기 쯤 오면 다음해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2학기 그것도 10월 쯤에 많이 떠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단체 카톡방에 ‘◯◯◯님이 나갔습니다!’ 기억하시지요?
그 때마다 제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아마 장경순선교사는 나보다 더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올 가을이 더욱 쓸쓸합니다.
오늘 본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쓴 로마서 맨 마지막 문안장입니다.
여기에는 무려 26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대부분 서신서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바울 서신에 기록된 그 수많은 이름들을 분류해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론
그러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기록된 이름은 누구일까요?
첫째, 바울의 <진바>입니다.
거룩한 강단에서 정치이야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이 하겠습니다.
우리 정치의 치부 중 하나가 계파 정친데 그 중에 <진박-진짜 박대통령의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진박>이 아니고 <진짜 바울 동역자>라는 의미에서 <진바>라고 했습니다.
이 <진바>중에는 우선 1-2절에 나오는 <뵈뵈>입니다.
‘맑고 깨끗한’이란 뜻을 가진 바울의 동역자로 고린도의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를 로마에 전달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뵈뵈는 바울을 비롯해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는 자매였습니다.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 후반)
그 먼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남자도 아닌 자매편에 보낸 것을 보면
바울이 뵈뵈를 얼마나 신뢰하는 자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3-4절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에서 바울과 만났던 부부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녔습니다.
로마-고린도-에베소-로마로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이 사는 집을 옮겨서라도 복음을 증거한 부부였습니다.
이 들은 본문 뿐 아니라 사도행전18장 2절과 18절과 26절, 고린도전서16장 19절,
그리고 디모데후서4장19절에 언급될 정도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어쩌면 바울의 최측근 동역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렇게 주를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내 놓을 만큼 헌신했던 사람은 또 있습니다.
바로 빌 2:16-30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매력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매력있는 동역자로
그는 죽을 병이 걸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주의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2:30)
바울은 그를 가리켜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
‘내게 쓸 것을 돕는 자’라는 수식어로 언급하기도 할 만큼 귀하게 여겼습니다(빌 2:25).
사도 바울의 <진바> 1순위는 뭐니 뭐니해도 <디모데>입니다.
시간 관계상 디모데에 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각별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디모데전서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디모데후서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고린도전서 4:17 “내가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이 보다 더한 찬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바> 중의 진바는 역시 <누가>이겠지요.
누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든 행적을 동행하며 기록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사도 바울과 동고동락했던 동역자들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런 동역자들을 보면서 참 많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진바>에 못지않는 저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기록된 이름은 누구일까요?
둘째, 바울의 <영적 열매들>의 이름입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에베네도는 사도 바울의 전도의 열매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6:15절에 보면 스데바나를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사도 바울은 빌레몬서1:10절에도 보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열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합니다.
사실 따지보면 본문에 나오는 26명의 이 뿐만 아니라 서신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도 바울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열매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의 전도 열매가 대부분 교회의 일꾼이 되었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선배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여러분도 중에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도 있고, 또 대학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까지 동역자로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분에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귀한 영적 열매이며, 복음의 동역자들입니다.
저는 지난 해 여름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3학년 휴학을 하고 군 입대를 한 김인규형제가 전역을 한 후 여름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리고 수련회 소감문을 제출했는데 무려 A4용지 7매 분량이나 되었습니다.
읽기도 지루할 수 있는 소감문을 감동적으로 읽고 제 칼럼으로 옮겼습니다.
다음은 그 형제의 소감문 일부를 소개합니다.
<죄의 특징은 자기중심성이라고 하더라구요.
복음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더이상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지만
죄의 습관이 남아있는 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에 의지하고 말씀에 의지할 때 조금씩 변화가 나타난다.
신앙생활 하면서 무너지고 회복되는 부분이 반복되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고 찔림이 되기도 하고, 혼자서 많은 고민들을 했었는데
이번 말씀을 통해서 꼭 필요한 부분들을 말씀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사했어요.>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께 능통하여야 하는데
과연 그만큼 내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있었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하는 그 원동력이 내 안에 있는가?
설득력 있는 말과, 그럴싸해 보이는 화려한 말들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말씀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앞으로 주어진 방학 기간, 그리고 다가올 2학기 사역 가운데서도
복음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캠퍼스의 회복과 복음화을 위하여 힘쓰는 우리 D맨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여름수련회와 땅밟기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배재철 장로님 격려사처럼, 삶의 예배가 수련회를 증명하는 방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채워지는 방학되기를 !! 승리하세요 ^^>
대표적으로 인규형제를 언급한 것은 인규형제가 바로 대학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한 그해 첫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외에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많습니다.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 등장하는 모든 제자들의 이름처럼
여러분의 이름도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될 줄 믿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계20:12)”
사역자에게 최고의 면류관은 ‘영적 열매’들입니다.
매년 수 많은 새내기들이 우리 공동체에 들어 옵니다.
그 중에 적지 않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합니다.
물론 그 중 일부는 공동체를 떠났지만 주님을 떠난 것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중에 DFC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저에게 최고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기록된 이름은 누구일까요?
셋째, 사도 바울에게 <아픔을 준> 이름들입니다.
디모데후서4장에는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10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14-15절)”
바로 데마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입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떠나가 버렸고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17-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2천 년 전에도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는 교회에 위장 침투한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엄격하게 조치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장차 ‘불못’에 던져질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런 멘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목회자의 수첩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속 썩이는 사람의 이름과
하나는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이다’
이제 제가 사역한지도 20년이 되었습니다.
사역자들에게도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우’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열심인 사람이 있고 주변에만 빙빙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인지상정인지라 열심인 사람을 더욱 고마워하고 신경 쓰게 됩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캠퍼스 대표를 하다가 내 팽개치듯이 버리고 떠나는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캠퍼스 시절에 가장 아꼈던 제자가 졸업한 후에 연락한 번 하지 않고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통상 이런 경우는 그 원인과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역자를 외면할 수는 있습니다.
사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지요.
혹시 저에게 상처 받은 지체들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떠나고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주님을 떠나지는 마십시오.
◆결론
다음은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가슴 벅찬 보고를 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이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모든 사람은 어딘가 그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온 이름들을 보면서
훗날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후일 나에게 어떤 평가를 내리실지 많이 두렵습니다.
지난여름 관람했던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정채산(이병헌 역)과 이정출(송강호 역)의 밤낚시 할 때 정채산의 명대사입니다.
이병헌이 송강호에게 말합니다.
<나는 나라 잃은 군인이오.
도망자 신세로 떠돌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익힌거라곤
사람에 대한 동물적 경곕니다
누가 내편이 되줄지
누가 내목숨을 이어줄지를
내 본능에 의해서 결정하는 거죠
내가 해야만 할 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이 대사를 이렇게 각색해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가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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