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침팬치
오늘 <신학과 철학> 수업 시간에 무슨 얘기 끝에 인간과 침팬치가 공동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별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질문했다. 인간에게 눈이 하나이거나 귀가 하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왜 인간은 지금 이 모양으로 생겨먹었을까? 아마 학생들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살았는지 별로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인간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모르긴 해도 외계인은 침팬치와 인간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유전자를 조사해봐도 거의 99%가 똑같지, 생김새도 똑같으니까 말이다. 이 말에 기분이 나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침팬치와 인간의 생김새가 어떻게 똑같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옳다면 인간은 오직 인간만의 유일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질문을 좀 바꿔서, 하나님이 지금 이 모양의 인간을 그대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게 바로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걸까?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고대인들은 신을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까?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은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전혀 다른 차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주조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이다. 그런 건 곧 우상 행위였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오늘 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냥 우리의 고정관념을 좀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이미 임박해 있는 그 나라의 문 두드림에 귀를 열 수도 없고, 문을 열 수도 없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앞으로 1억년 후에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SF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화성인처럼
머리만 크고 다리는 퇴화된 모습일 가능성은 없을까? 아마 어떤 사람에게 이런 모습은 해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의 현재 모습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우리 기독교 신앙, 또는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 약속된 부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생명은 현재 우리의 생명에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금은 보화가 가득하고, 면류관을 쓰고, 먹을 게 너무나 풍부한 그런 장소를 천국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아무리 진지하고 열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의 이런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인해서 유지되고 있는 이런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하나님 나라, 혹은 부활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약간이라도 의식하게 되면 놀라게 되고 당혹스러워지고, 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런 놀람, 당혹, 위기가 곧 기독교 영성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흡사 죽은 다음에 들어가게 될 천국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은 사람처럼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이런 방식의 삶이 연장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 무엇이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신학적으로 설명은 할 수 있지만 궁극적 생명과 이 현실의 생명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 실증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건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죽 했으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꾸고 이게 나비의 장자 꿈인지, 장자의 나비 꿈이지 혼란스러워했겠는가.
다시 인간과 침팬치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끝내자. 우리에게 침팬지와 공동의 조상이 있다는 진화론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내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진리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의 섭리를 느낄 수는 없을까? 중요한 건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지 그 과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진화론적인 세계 해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런 귀기울임, 그런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분명히 업그레이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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