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에 관한 논란을 접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그저 말장난 비슷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단지 언어유희로 지면을 채울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가 교회 밖의 구원에 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그래서 선교를 교회의 지상과제로 여긴다면 당연히 교회 안의 구원에 관해서 먼저 진지한 성찰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구원도 명확하지 않은 공동체가 다른 이들의 구원에 관해서 간섭한다는 건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우선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놓여 있는 함정에 관한 해명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함정은 세 가지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교회 안에 구원이 이미 담지 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과연 교회는, 더 정확히 말해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았을까? 근본적인 원리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교회 구성원들이 모두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로 이 질문을 피해갈 수도 없다.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는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굳이 신학적인 논란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지금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삶과 외면적인 삶에 내재해 있는 분열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확신만으로 본다면 우리보다는 이단들이 윗길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한다는 건 남편에게 끊임없이 구타당하면서도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여자들의 병리적 심리 상태와 비슷하다.
둘째,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신한다.
우리의 논의에서 아마 이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일지 모르겠다. ‘구원받았다’는 구호는 교회 안에서 무성하지만 그 구원의 내용에 관한 담론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구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된다면 우리는 구원의 내용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논의 안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런 일들이 교회 현장에서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이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 해석인 종말에 관해서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논의를 치열하게 끌어가야 할 텐데, 그런 일들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구원의 껍질에 단맛을 씌우는 일에만 관심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요즘 한국교회의 설교가 옛날에 비해서 훨씬 ‘찐’(?)하게 ‘엔터테인먼트’로 변질되고 있는 현상도 역시 구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연유한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세상이 성속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성속 이원론이 우리 기독교인의 의식 안에 너무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세상을 구원해야 할 것처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한다. 물론 교회 공동체가 자기 욕망의 성취에만 기울어져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거룩한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하겠다는 열정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성속이원론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의존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해명하기 위한 인식론적 도구일 뿐이지 교회와 세상을 존재론적으로 분리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예수가 왜 세리나 죄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상대화했고, 바리새인들의 ‘분별심’을 거부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닌가,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공동체로서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 이 세상과 대립하는 어떤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금이나 빛처럼 세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가 곧 교회다.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게 이 세상을 섬기는 가장 귀한 일이 아닌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자기 영역을 넓히는 게 아니라 그런 자리다툼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의 원리를 포기하고 은총의 원리에 의존하는 복음만을 전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굳이 전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존재하기만 하면 이미 그것이 복음 선포이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담긴 확신이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의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 안의 구원에 진정성이 확보되기만 한다면 교회 밖의 구원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교회 안의 구원도 매우 불확실한 상태에서, 더 솔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거부하면서 교회 밖의 구원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이런 방법론적인 문제까지 언급할 수는 없다. 구원의 물꼬를 교회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큰 원칙만은 제시해도 괜찮을 것 같다. 교회가 구원받으려면 교회가 끊임없이 자기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치중해야만 한다. 본질에 치중하는 일은 신학운동과 실천운동에 있다. 예컨대 교회 단일성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 심화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로 교회의 단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치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만약 교회가 더 이상 분열하지 않고, 더 이상 빈익빈부익부에 매몰되지 않고,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면 그걸 토대로 구원의 힘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밖으로 흘러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