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생활의 잘못된 특징은 피상적으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대충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 주요 원인은 성경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지를 않는다.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성경을 가까이 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야 할 교훈의 모범이요, 우리 인생과 교회의 유일한 권위이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성경만이 절대 권위라는 것은 오랜 교회역사를 일관하여 전통적으로 지켜 왔다.
우리는 주관적 체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선한 영도 있지만 악한 영도 있기 때문이다.
가짜 체험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영적 은사와 체험을 사모하되 항상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또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영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성경과 성령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무미건조한 정통에 빠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성경은 계획을 세우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그날의 분량을 읽고서는 그 말씀들을 묵상하며 삶 가운데 적용하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겸손한 논평이 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자기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다 보면 어떤 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다른 면은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독학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성경은 실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성경이 계시하신 그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항상 인식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첫 머리 5장에서 7장까지의 주님의 설교,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만 한 설교가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 모두에게 한 설교이다.
산상수훈에 있는 교훈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나 있다.
산상 수훈은 천국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게해 주는 천국에 대한 완전한 표현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오늘 모든 참된 기독교인 속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주님은 교회가 그분을 참으로 인정할 때 교회에서 다스리신다.
천국은 임했다. 천국은 임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 곳마다 천국은 임한 것이요,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과 삶에서 이렇게 통치하고 계신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그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요 하늘 나라요 우리가 들어간 천국이다.
팔복의 말씀이 가혹하다고만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기독교인인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내가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사람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며,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의 시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천국을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물질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로마제국의 속박과 법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줄 분으로 생각했다.
천국은 원래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하여 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산상 수훈에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서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없다.
‘너희가 기독교인이니까 이렇게 살아라’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훈을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2:14)
산상 수훈만큼 중생과 성령과 그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내 힘으로는 그 교훈을 살 수 없고,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산상 수훈을 묵상하며 실천하며 살면 살수록 우리는 더 많은 축복(팔복)을 받게 될 것이다.
산상수훈을 제쳐 놓고 성화를 체험하고 이루라고 하는 가르침들은 다 잘못된 것들이다.
우리가 생활에 능력을 얻으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산상수훈으로 곧 바로 가야한다.
산상 수훈을 실천하며, 몸을 내어 맡길 때,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오’
만일 여러분이 배부르기를 원한다면 어떤 신비한 축복(체험)을 찾으러 헤매지 말라.
이 축복을 얻으려고 여러 집회에 달려가지 말라. 여러 스승들을 쫓아다니지 말라.
그 대신 산상수훈과 그 의미와 요구를 정면으로 대하라.
여러분에게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을 실천하라.
그러면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축복의 지름길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도단과 행사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할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사는 데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건물 속으로 밀려 들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으셨고, 성령을 보내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산상수훈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교회사를 읽어 보면,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항상 산상수훈을 실천하며 살 때 일어났다.
세상은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매혹되고 끌려오는 것이다.
(청교도시대에 많은 부흥을 주셨다. 오늘도 청교도신앙으로 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회심과 부흥을 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은 뒤에 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머지 복들은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애통, 온유, 의)
누가복음 6:20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다.
성경은 아무데서도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 처럼 일부러 가난해지고 부귀에 등을 돌린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꼭 같이 하늘나라와는 거리가 멀 뿐이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이나 유익이 될 수는 없다. 가난이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가난’이란 말씀을 세속 정신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를 탐하고 부귀에 의존하는 세속 정신은 죄이다.
가난하지만 많은 부자들과 꼭 같이 부귀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만일 내가 무엇 무엇만 갖고 있다면’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추구하고 사모한다.
그들이 그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들은 복되지 못한다.
우리 주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영이다. ‘영’의 가난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그가 부자이든 가난뱅이이든 중요한 것은 ‘영의 가난함’ 이것이다.
기독교인과 세상 사람은 이 점에서 절대적으로 구별이 된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신념과 자기 의지와 자기표현을 크게 강조하고 자랑한다.
너 자신을 믿고, 너 자신을 표현하고, 네 속에 있는 능력을 세상에 알게 하라고 한다.
교육과 지식의 힘으로 사람들(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고상한 인간(사회)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얼마나 괴리가 큰지 모른다.
알면 사는 것으로 착각하며 지내다가 죽을 때 쯤에야 아닌 것을 깨닫는다.)
심령의 가난함은 이러한 정신과 절대적으로 대조(반대)가 되는 것이다.
찰즈 웨슬리는 이런 찬송을 만들었다.
“당신의 이름은 의롭고 거룩하오나 저는 온통 불의뿐이오며
저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으나 예수께는 진리와 은혜 충만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비웃으며 말했다.
“직업이나 직장을 구하는 사람이 고용주에게 가서 말하기를
‘저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습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고 했다.
그런데 이 찬송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한 것이다.
이 축복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인기가 없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시대, 특히 청교도시대와는 너무나 크고 놀랍게 달라졌다.
오늘의 교회는 다른 복음들이 들어와 세상과 마찬가지로
도전성과 자신감을 격려하고 높이며, 개성을 나타내려 애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일꾼들과 위대한 전도자들의 활동 기록을 보라.
그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표면에 나서지 않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은 이와 반대이다. 광고와 사진들이 표면에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함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다.
그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며 두려워 떨었다’고 했다.
자신감과 개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외모가 보잘 것 없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귀감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닮아가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무엇보다 세상에 홀리지 않아야 한다.
세상을 끌고가고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말이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소심하거나 용기가 없거나 수줍어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타나 있는 자질 중 타고난 자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외모와 인상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항상 올바른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거짓되게 십자가에 못박거나 다른 사람의 개성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큰 희생을 하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거나 일상 삶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위대한 학자들의 겸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광대한 지식에 대한 겸손이지, ‘영의 겸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이사야가 표현한 것을 말한다.
존귀하고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겸손한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기드온과 같은 사람의 영이다.
하나님이 그가 해야 할 큰 일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을 때, 그는,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고 했다.
그것은 모세의 정신과 같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깊이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의식했던 것이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로 보내소서’ 했다.
다윗에게서도 그것을 본다. ‘주여 내가 뉘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했다.
이사야에게서도 본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함’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구약성경은 일관해서 보여주고 있다.
신약에서도 사도 베드로에게서 이 가난한 영을 본다.
그는 태생적으로 공격형이요 자신만만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믿는 현대의 전형적인 세속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뵈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약하거나 신경이 약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았다. 베드로 고유의 개성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심령이’ 가난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것을 본다. 큰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난 후로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고린도에서는 ‘약하고 두려워 떨리기’ 까지 하였다.
그는 심령이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의 생애에서 ‘가난한 영’을 본다.
주님은 사람이 되셨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그 대권을 쓰지 않으셨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여기 땅 위에 계시는 동안 사람처럼 사시기로 결정하셨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에게 절대 의존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분이 기도로 보낸 시간을 보면 주님의 가난한 영과 하나님을 의뢰한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자만심이 완전히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자신의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태생적인 혈통이나 가문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태생적 지위나 능력, 자기가 쌓은 학력이나 경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서 이와 같은 느낌을 가져야 한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된 것처럼 ‘죽은 자’ 같이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길은 성경을 읽고 그의 법을 알고,
우리가 그 앞에 서 있음을 응시하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들 스스로는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심령이 가난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것이다.”
'좋은 말씀 > 강대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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