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탐심의 사람, 뜻의 사람 (삼하 3:6-11)

새벽지기1 2016. 10. 3. 11:58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신 후

우리에게 마음과 뜻을 달라고 하신다. 힘과 목숨을 달라고 하신다.

(신6:4-5)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마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주님께서 자기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씀과는 얼마나 대치되는 행동인가?

 

칼빈은 경건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유일하고도 합당한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나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함이다.

(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거져주시는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으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뜻이 우리의 힘과 목숨이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나의 평안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다른 것을 위한 것이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탐심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세상이든 비전이든 탐심으로 섬기는 우상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판 우상인 것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인 것이다.

 

탐심은 무엇인가? 마음이 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게 유익한 것, 평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탐심이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좋은 것들을 보니까 마음이 끌려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탐심대로 행하다가 망했다.

망하는 데 40년이 걸리니까 회개할 줄을 모르고 설마 설마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스라엘과 유다도 태평성대에 선지자들을 보내어 탐심의 우상숭배를 하다가 망하고

흩어질 것을 경고하였지만 설마 설마 하며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평안을 믿다가 멸망했다.

 

홍수로 인류가 심판을 받을 때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도, 시집가고 장가가고

일과 소유에 미쳐 돌아가다 하루 아침에 멸망의 심판이 닥쳤다.

(시50: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우리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된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마음에서 선도 나오고 악도 나온다고 하셨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마음이 탐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상충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미약한 가운데, 없는 가운데 시작하니까, 그 뜻 좇기를,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묵은 포도주와 낡은 부대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새 포도주와 새부대가 부담스럽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유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자기들보다 못하고 덜 가진 자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기득권이 없는 소외 계층들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

 

기득권자들은 마음이 탐하는 것들을 좇았고, 소외계층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았다.

제자들은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과 그분의 뜻을 좇았다.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 익숙하던 것들을 버려두고 주님의 뜻을 좇았다.

 

거대한 전통의 유대 종교세력들의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그들의 탐심을 책망하다, 그들의 탐심대로 십자가 형에 처해졌다.

(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뜻은 탐심의 기득권 위에 세워진 적이 없다. 탐심을 회개해야 천국을 산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환경과 상관 없이 천국을 살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다.

뜻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영원한 것을 믿는다.

환경이 그 뜻을 꺽을 없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구원 계획(하나님의 뜻)을 실행에 착수하시면서

왕궁에서 시작하시지 않고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시작하셨다.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사셨다.

 

제자들을 삼으시되 예루살렘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택하시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택하셨다.

주님의 주 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리 어부들의 땅이었다.

구원의 방법도 황제의 칙령이나 권력의 동원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십자가의 극형이었다.

 

탐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길이었다.

탐심은 기득권위에 좀 더 쌓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누군가가 그 기득권을 빼앗을려고 하면 그는 원수이고 죽어 마땅한 녀석이다.

 

탐심이 왜 우상숭배가 되는가?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는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른 것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을 쏟으면, 우선은 뭐가 되는 것 같고, 얻어지는 것 같고,

장래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좀 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산다는 데 문제가 있다.

 

탐심의 우상숭배는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몰락을 가져 온다.

삶의 목적이 잘못 되었는데, 우상을 숭배하고 헌신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징계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다.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을 하였다.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힘과 목숨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면서 하였다.

 

그 중심에 일이 아니라,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었다.

경건생활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들의 헌신과 검소한 생활이 자본을 축적하게 하였고, 그 토대위에 자본주의가 세워졌다.

 

청교도 정신과 신앙이 중심에 있는 동안은 자본주의는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 신앙과 정신이 무너지면서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의 제도로 변해 갔고

빈부의 격차, 소위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공산주의를 잉태하는 빌미를 주었다.

 

청교도들은 탐심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다.

핍박과 고난이 몰려왔지만 굴복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 뜻에 마음과 목숨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과 그들의 나라를 축복하셨다.

 

탐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를 바란다.

탐심은 패망을 불러오고, 하나님의 뜻은 축복과 영광을 가져옴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선 배부른 것이 결국은 영원한 배고픔을 불러오고

우선 뜻을 좇느라, 없고 고픈 것이 영광과 축복을 가져옴을 믿으시기 바란다.

 

모세는 보장된 애굽 왕실에 대한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40년의 광야생활을 감당하고 마침내 크게 쓰임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탐심의 사람 아브넬을 보게 된다.

그의 생애와 최후를 보면서 경계를 삼고 뜻을 좇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사울왕 시절에 그는 군대장관이었다. 국방부 장관이었다. 군권을 손에 쥐었다.

 

2장에서 보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사람이 아브넬이다. 킹메이커이다.

(삼하2:8-9)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본문 1절에 보니까, 사울의 집과 다윗의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그는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았다.

그러던 중 죽은 사울왕의 첩을 하나 취했다.

 

그랬더니 이스보셋 왕이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고 책망을 했다.

이 말이 아브넬의 마음을 극도로 상하게 하였다.

 

(삼하3:8-10)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꼴같지 않은 왕이 감히 나를 비난해?, 나를 가르칠려고 해?

‘내가 너, 왕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왕을 세운 것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내 은혜이고 은공이거늘

겨우 사울의 첩 하나 내가 가졌기로 그 허물로 시비를 삼느냐.

 

오냐, 너 한번 죽어 봐라. 어디 그 잘난 것 다 잃어 봐라.

네 가진 것을 싹 쓸어서 다윗에게 주고 말겠다. 감정적 보복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뜻이 그 일의 명분이 된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 맹세는 10절에 나와 있다.

 

이 맹세는 온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브넬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그 길을 갔어야 했다.

그가 탐심을 좇았기에 사울의 군대장관으로서 사울의 피붙이를 왕위를 계승케 하고

그 모든 권세와 부귀를 다 누렸다.

 

그것이 오래 갈 줄 알았겠지요. 그렇게 잠시 밖에 못갈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했겠지요.

그런데 왕같지 않은 왕이 죽은 아비의 첩 하나 가졌다고 시비를 거니

빈정이 팍 상해서 여호와의 맹세 곧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돌아선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지만

그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와 탐심이다. 마음의 탐하는 대로 움직인 것 뿐이다.

 

그것도 내가 그 맹세를 이루게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고 한다.

사울왕도 생전에 자기 탐심대로 하면서 벌 위의 벌을 운운한 적이 많이 있다.

 

다윗도 성숙하지 못한 때에는 나발의 남자들을 씨를 말리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일 것이라고 갖다 붙인다.

자기 마음이 탐하는 대로 살면서 여호와의 뜻과 벌 위의 벌을 앞세울 일이 결코 아니다.

 

아브넬은 탐심을 따라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왕이 책망하니까

또 탐심을 따라 다윗에게로 붙는다. 하나님의 뜻을 핑계로 말이다.

사울왕 또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탐심을 따라 살다가 망한 사람이다.

 

탐심은 우선 권세와 많은 것들을 얻는 것 같지만 그 끝이 좋지를 않는다.

뜻을 앞세우면 기득권자들이 싫어하고 핍박과 고난이 닥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심에 안주하기를 좋아한다.

크고 화려한 것, 탐스러운 것 속에 있으면 웬지 안 망할 걳 같고 안심이 된다.

뜻을 좇는 사람들은 가진 게 없다. 될성 싶지가 않다. 불안하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바뀌었다.(장개석과 모택동)

 

그 탐심이 끝까지 그 유익과 기득권을 유지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아브넬의 최후가 그것을 말해 준다. 사울왕의 생애도 그렇구요.

2장에서 아브넬은 전투에서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좇아 오는데 달래다가 안되니까

창으로 찔러 그를 죽이고 만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그 형 요압의 복수로 비명에 죽고 만다.

 

다윗이 잔치를 벌려서 그를 환영해 주었고, 그래서 이제 다윗 밑에서 또 한 자리 차지하여

부귀와 권세를 누릴 줄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복병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삼하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이런 일들이 인간끼리의 탐심과 복수의 우연한 소용돌이 같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이스보셋도 뜻의 사람이 아니라 탐심의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겨우 아브넬이 아버지 첩을 가져간 것으로 시비를 걸다가 2년만에 몰락하고 만다.

그릇이 안된 사람이 왕권을 쥐면 공의가 아닌 사소한 일로 시비만 붙다가

본인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만다.

왕이 된 것이 불행한 사람들이 역사 가운데 많이 있어 왔다.

 

아사헬 또한 뜻보다는 탐심을 따라가다 망한 사람이다.

발이 빠른 자기 재주만 믿고 공명심에 불탔다.

아브넬이 요압을 생각해서 말리는 데도 쫓아와서 창으로 죽이고 만다.

이 살인이 결국 아브넬의 죽음을 가져온다.

자기가 살겠다고 한 짓이 자기의 죽음을 가져 온다.

 

요압 역시 뜻을 쫓기보다 탐심을 좇는 인물이다.

다윗을 도우며 군권을 쥐었다고 오히려 다윗을 위협하는 형국이다.

아브넬을 그냥 보냈다고 항의하고 탐심을 따라 동생의 복수로 아브넬을 죽인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로 돌아와야 할 때에 그 뜻은 아랑곳 없이

자기 마음 가는 데로 감정 가는 데로 휘젓는다.

그의 교만은 다윗의 탄식을 불러오고 솔로몬 대에 가서 비참하게 죽는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모든 일들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다.)

3:39, 내가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다윗은 뜻을 좇아 산 사람의 대표이다. 때를 기다린다.

뜻을 따라, 십수년간의 아둘람 생활과 적진에서의 생활을 살아 낸다.

때를 기다리며, 7년 6개월을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으로 산다.

아브넬이 비명에 가자 금식하고 애도한다.

그것이 그의 누명을 벗겨주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그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다.

 

뜻을 좇아야 한다. 뜻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를 좇고 탐심을 좇다가는 패망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마음이 탐하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만 가다가는 영광이 아니라 패망으로 가게 된다.

 

뜻은 미약한 곳에서 시작한다. 탐심은 지금의 강성한 곳에서 시작한다.

탐심은 지금의 왕과 왕궁으로 몰려가고, 뜻은 미래의 왕과 아둘람굴로 간다.

 

탐심은 현재를 붙들고 뜻은 미래를 붙든다.

탐심은 기득권의 톱니가 되기를 원하고, 뜻은 새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탐심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좇는 저와 여러분이 되자.

 

지난 주 월요일에 시작된 ‘나실인성경원’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졌다.

우리 교회에 사명으로 주어진 말씀학교이다. 치유학교이다.

이곳에서 나실인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양육 배출될 것이다.

그들은 청교도들을 본받아 순수한 말씀으로 훈련받아 세워지고

불치의 암들을 치유하는 은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훈련 받고 세워지기를 원한다.

내 안일과 유익을 추구하던 탐심의 삶에서 벗어나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결단하는 사람들이 나오길 바란다.

내 인생과 내 가정의 행복과 형통이 뜻을 좇아 살 때 이루어질 것이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안일과 성공을 추구하다 낙심하는 이들에게 준 말씀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되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는 것이다.

 

뜻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마침내 풍성한 열매와 영광을 거두시기 바란다.